[논단] 대각성운동의 재현과 찬송가

[논단] 대각성운동의 재현과 찬송가

[ 논단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6년 12월 06일(수) 00:00

문 성 모
서울장신대학교 총장

1907년 평양 대각성운동 1백주년을 위한 기념사업이 한창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런 대각성운동의 리바이벌을 꿈꾸면서 대각성운동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인 찬송에 대하여는 어느 세미나나 회의에서도 전혀 언급조차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그 하나는 내년에 있을 평양대각성운동 1백주년 행사를 그저 일과성의 행사로만 끝내려는 심산이다. 거창한 기념식과 요란한 팡파레와 그럴듯한 행사들로 1백주년을 기념했다는 것을 역사에 남기고 이를 주관했던 사람들의 기록을 자랑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행사비용과 인력이 낭비되면서도 한국교회 부흥을 위하여 실제로 남는 열매는 없게 된다. 또 한 가지 원인은 찬송에 대한 무지이다. 오늘날의 대각성운동에 맞는 새로운 찬송가를 만들어내는 일의 중요성에 대하여 감각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세계의 모든 대각성운동의 물결에는 그것을 돕는 수많은 찬송들이 창작되었다는 것이다. 즉 찬송은 말씀과 더불어 교회 부흥을 주도한 두 수레바퀴이다. 종교개혁 시대의 루터나 칼뱅이 모두 찬송에 많은 배려와 창작을 지원하고 지도하였다. 요한 웨슬리의 대각성운동 곁에는 찰스 웨슬리가 있었고, 무디의 부흥회에는 유명한 음악가 생키가 있었다.

그 밖에도 커크패트릭, 브래드버리, 다이크스, 가브리엘, 메이슨 등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작곡가들과 크로스비, 빌혼 등의 시인들이 영국과 미국의 대각성운동에 필요한 수만 편의 찬송가들을 창작하고 연주하여 부흥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였다. 또한 그 시대의 많은 부흥사들은 스스로 작사 작곡을 하여 자신들의 말씀에 필요한 찬송들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영국과 미국의 부흥의 물결이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를 휩쓸었다. 그와 함께 당시에 만들어진 찬송들이 전 세계에서 불려지고 있고 우리나라 찬송가의 대부분이 그 대각성운동의 산물이다.

우리나라의 1907년 대각성운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각성운동의 불씨를 지핀 선교사들이 대부분 음악에 열의를 보이고 찬송가집을 만들었던 사람들이다. 그 이후 한국의 길선주, 이성봉 등의 부흥사들도 모두 자기에게 필요한 찬송 가사를 쓰고 기존 찬송가 곡조에 얹거나 새로 창작하여 사용하였고 부흥성가의 붐을 이루었다. 그리고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모두 8종의 공인 찬송가가 발행되었고 특히 1908년의 최초의 연합찬송가인 '찬숑가'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찬송가의 모체가 되었으니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대각성운동을 위하여 새로운 말씀이 필요하듯이 새로운 찬송 없는 대각성운동은 발 없이 마라톤이나 손 없이 권투 시합과 같은 무모한 일이다. 문제는 어떤 찬송을 어떻게 사용하여 부흥을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무 찬송이나 이로운 것이 아니고 찬송을 많이 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찬송의 관점에서 완전히 미국에 종속되어 초기의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펜윅, 길선주 등이 노력했던 한국화에 대한 의지를 상실한 채 이방종교화 되어버렸다. 목회자들은 찬송에 대하여 지도할 능력이 없어서 주로 젊은 층으로 구성된 찬양팀에 일임한 채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교회가 진정한 부흥의 리바이벌을 원한다면 오늘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부흥을 방해하는 찬송부터 정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부흥을 위한 찬송은 무엇인가에 대한 지도와 방향제시를 할 때만이 1907년의 행사는 지속성을 지니게 되고 한국교회에 새로운 부흥의 물결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한국인의 손에 의해 수많은 부흥을 위한 찬송이 만들어져야 한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가사를 만들고 그 가사들이 찬송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2007년의 대각성운동의 물결이 아시아를 비롯한 아프리카와 남미와 노쇠한 기독교국가인 구미(歐美)에까지 영향을 주어야 하며, 그와 함께 한국의 대각성운동을 위해 만들어진 찬송들이 아시아와 세계에 퍼져 널리 불려져야 한다.

2007년의 대각성운동을 위한 행사는 눈앞에 있는데 이를 위한 대회가(大會歌) 하나 만들 생각을 아무도 하고 있지 않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