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외교'에 대한 단상

'벼랑 외교'에 대한 단상

[ 논단 ] 주간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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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4월 12일(화) 00:00
신동작/목사ㆍ부산장신대 총장서리

요즈음 세계의 주요 이슈 중 하나인 핵문제에 관한 북한의 대응을 '벼랑 외교'라고 표현한다. 매스컴을 통해 실로 당혹스럽고 아찔한 북한의 외교 정책들을 대하면서 착잡함을 감출 길이 없다. 어떤 이들은 북한의 배수진을 친 듯한 줄다리기식 외교에 식상하고 안보상의 위험을 느껴 아예 외국으로의 이민을 결심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사의 제(諸) 문제를 극단적인 경우의 수만을 두고 해결하려 드는 태도는 비단 북한만의 자세는 아닌 것 같다. 사회 일각에서는 이미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고 걱정한지 오래이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청부살인하려 하고, 유산 문제로 가족 간에 살인이 일어나며, 실직한 가장은 온 가족을 동반자살로 이끌어 세상을 버리게 하는,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사건들이 실화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사건들에 면역이 생겨 별반 놀라지도 않는다.

우리 민족성의 저변에 이러한 극단적 심성이 고질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이런 저런 요구를 안 들어 준다면 죽음도 불사 하겠다"는 위협이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 이기주의의 속에서도 적잖이 발견된다.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어 가고 있는 것일까? 이 건강치 못한 의식 구조를 변화시킬 방도는 없는 것일까?

그런데 더욱 안타깝게도, 우리 교계를 돌아볼 때 많은 교회의 사건들 속에서 벼랑 외교를 답습하는 듯한 행보를 자주 접하게 된다. 교회의 지도자들 역시도 자신의 이익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 때문이다. 특히 교회의 다툼 한 가운데는 다른 명분으로 포장된 '돈 문제'가 자리 잡고 있는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자신에게 손해가 될만한 일에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으면서 상생(相生)보다는 공멸을 선택하다가 주의 영광을 가리는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이를 단지 말세의 징조로만 치부해야하는 것일까?

교회 성장을 목표로 선교에 열심을 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에 앞서 교회가 서 있어야 할 본연의 자리에 서는 것은 더 중요하다. 자칫 그 열심이 나를 드러내려는 잠재된 야심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의 이름으로 선교하다가 핍박받고 조롱당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우리가 스스로의 잘못과 스스로 영광을 취함으로 질타와 모멸을 당하는 것은 마태복음 23장의 위선적인 바리새인의 자리에 서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스스로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아야 한다. 현재 내가 가장 집착하는 그 목표가 나의 생명을 걸어야할 만큼 주께서도 인정하시는 소중한 일인지를 우선적으로 물어야 할 것이다. 이런 성찰이 없이 달려가는 자는 미숙한 시절의 베드로의 어리석음을 똑같이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은 믿음은 강조하면서 자기희생적 덕을 세움에 대해서는 너무 소홀하지 않았는지 자성하게 된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은 '벼랑 외교'와 같은 극단적 선택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선에서 상생의 길을 찾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예수께서 모본(模本)이 되어주신 기독교의 기본정신은 내가 죽어 남을 살리는 것이다(요 12:24).

이 땅 위의 삶 속에서는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 이외에는 우리의 목숨 걸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 이제 벼랑에서 내려와 너와 내가 우리가 되어 함께 살아갈 지혜를 찾자.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도 내리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마 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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