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진자의 모습으로 산, 한국 교회음악의 아버지

빚진자의 모습으로 산, 한국 교회음악의 아버지

[ 한국교회인물열전 ] 6. '어서돌아 오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작곡한 박재훈 목사

김성진 기자 ksj@pckworld.com
2021년 08월 30일(월) 19:54
한양대 교수 시절.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 한국 기독교인들이 좋아하고 즐겨 부르는 찬송 중의 하나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떠올리며 곡을 붙인 이 찬송가는 죄인을 향해 회개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올 것을 권하는 한국 최초의 복음 찬송가로 불린다. 교회음악가이며 실천신학자인 서울장신대 전 총장 문성모 목사가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찬송가일 뿐 아니라 교파와 인종을 초월해 애창하는 국산 찬송가라고 일컬을 정도다. 이 곡을 작곡한 이가 지난 8월 초에 세상을 떠난 박재훈 목사. '한국 교회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어서 돌아오오'를 비롯해 '지금까지 지내온 것' '산마다 불이 탄다'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곡을 신앙의 유산으로 남겼다.

박재훈 목사 가족사진.
일평생 교회음악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알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던 박재훈 목사. "교회음악이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교회음악에 대한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분." '작곡가 박재훈 목사 이야기'의 저자이기도한 문성모 목사는 그가 걸어온 삶을 한마디로 이렇게 소개했다. 문 목사는 "명성과 함께 노후가 보장된 삶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항상 부족함을 고백하며 빚진 자의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분"이라며 "그는 힘든 우리 시대의 자산"이라고 덧붙였다.

1922년 강원도 김화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박재훈은 어린 시절부터 교회 풍금(오르간)을 접하면서 음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을 해야 했던 그는 평양에서 목회하던 큰 형 박재봉의 도움으로 평양요한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한국교회 음악의 개척자인 구두회를 만나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리고 일본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났지만 그는 일제시대에 유학생들이 강제징용을 끌려가는 일이 빈번했고 또한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어 결국 한 학기만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박재훈 목사가 직접 작곡한 동요, 찬송 등을 모은 책자.
그러나 이 시기는 서양음악에만 갇혀있던 그가 한국적인 음악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됐다. 동년배이면서 일본에서 유학을 했던 나운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문성모 목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박재훈 목사는 신앙도 보수이지만 음악도 보수적인 성향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연배가 비슷한 나운영의 음악은 실험적이었고 토착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박재훈 목사가 볼 때에 나운영은 실력이 있어 보였고 그래서 그에게 부탁해 몇 개월 음악을 배우기도 했는데 그 때에 서양음악에서 한국적인 음악으로 돌아섰던 계기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 때 박재훈 목사가 쓴 곡이 '지금까지 지내온 것', '산마다 불이 탄다' 등이었다.

유학을 마치지도 못하고 반년만에 귀국한 그는 국민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동요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을 당시에 그가 작곡한 동요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산골짝의 다람쥐' '시냇물은 졸졸졸졸' '송이송이 눈꽃송이'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셔요' 등등. 북한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는 남한으로 피난을 내려와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찬송 성가집 '찬미'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 때, 김정준 목사의 시에 곡을 붙인 '어머님의 은혜'는 한국인에 의한 만들어진 절기 찬송가의 시초였으며 6.25 전쟁 중에는 '눈을 들어 하늘 보라'를 작곡하기도 했다.

전쟁 후, 그는 한양대 음대 교수로 일하면서 영락교회에서 찬양대를 지휘했다. 영락교회 지휘자로 있을 때, 그는 호랑이 지휘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고 한다. 찬양대원들이 1분만 늦어도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찬양대원들이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화를 내고 성가집을 집어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개인적으로 만나면 성자와 같은 성품을 지녔다고 한다. 박재훈 목사는 그 이유를 스스로 이렇게 대답했다. "찬양은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박재훈 목사를 생각하면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이 이 말이라고 문성모 목사는 고백했다. "교회음악,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온전한 제물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흠이 있는 제물은 가져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실한 찬양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제물을 받으시겠습니까."

오페라 첫 작품인 '에스더' 공연을 관람한 후, 본보와 인터뷰한 기사.(본보 아카이브)
1973년, 그는 영락교회 찬양대 지휘와 한양대 교수를 그만두고 갑자기 미국으로 떠났다. 안정된 생활이었고 삶에 안주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런 것들을 과감히 버렸다. 당시 그는 한양대 재직 시절, 오페라 '에스더'를 작곡하고 있었다. 오페라는 그에게 첫 작품이기도 했다. 에스더를 작곡하면서 그는 스스로 작곡가로서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마음 깊이 느끼고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한 목적은 작곡하라는 것인데 이렇게 실력이 없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에 빠졌다고 한다.

'작곡가 박재훈 목사 이야기'를 집필한 문성모 목사.
사실, 당시 에스더는 주위에서 호평을 받았고 재공연도 했던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실력 없는 작곡가라고 고백할 정도로 마음이 깨끗했고 겸손한 인물이었다. 그는 영락교회 찬양대 지휘도 한양대 교수도 그만두고 부족한 작곡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문성모 목사는 당시의 박재훈 목사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하나님이 작곡가로 자신을 불러주셨는데 삶에 안주하면서 작곡은 안하고 딴 짓만 한다는 죄책감이 들어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것이 오페라 '에스더'라는 곡이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실력이 없고 죄인이며 부족하고 더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해 지금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는 사람은 주위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박재훈 목사는 그렇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위대한 신앙인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지휘하는 박재훈 목사.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잠시 체류한 후에 캐나다에 정착해 그곳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큰빛교회에서 목회사역도 감당했다. 큰빛교회에서 박재훈 목사의 후임으로 목회 사역을 감당했던 임현수 원로목사는 한 칼럼에서 박재훈 목사를 이렇게 언급했다. "박재훈 목사님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던 고달프고 힘들었던 시기, 흑암에 앉은 백성 같이 소망을 갖기 힘들었던 고통의 시대에 태어났다"면서 "결과적으로 보면 목사님은 태어나시면서부터 민족의 한을 풀어야 하는 큰 숙제를 안고 태어나신 분"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을 너무도 사랑해 모든 무리 중에 경외심이 뛰어 나셨던 목사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 순간도 잊지 않으셔서 생의 자세가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으셨던 십자가 중심의 목사님, 북한 백성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며 복음 통일을 그렇게도 간절히 기다리셨던 애국자 목사님, 아들도 사위도 훌륭한 목사로 만들어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처럼 사랑을 바쳤던 목사님, 선교사님들을 말 없이 사랑하셔서 있는 돈 없는 돈을 일일이 한분 한분에게 선교비로 보내시며 평생 선교를 실천하셨던 경건한 노인 시므온 같으신 목사님"이라고 회고했다.

영락교회 시온성가대 지휘자 때의 모습.
자신에게는 혹독할 정도로 엄했던 반면 타인에게는 한없는 희생과 겸손으로 관대함을 보였던 박재훈 목사. 더구나 하나님 앞에선 항상 부족한 빚진자의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그는 우리 시대에 찾아볼 수 없는 신앙의 자산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박재훈 목사의 삶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 '에스더 결의' 절실할 때(본보 1986년 5월 3일자 8면)

1984년 4월 27일 오페라 '에스더' 공연을 관람했던 박재훈 목사의 소감이 담긴 본보 기사. 당시에 오페라 '에스더'의 극본을 썼던 당시 본보 편집국장 김희보 목사와의 만남에서 박재훈 목사는 "이번 공연의 의도 역시 한국 교회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 나라의 장래를 걸머지고, 일치해야 하는 당위성을 제시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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