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노동자와 함께 공감했던 '바보 대행진'

소외된 노동자와 함께 공감했던 '바보 대행진'

[ 한국교회인물열전 ] 7. 노동자의 아버지 조지송 목사

김성진 기자 ksj@pckworld.com
2021년 11월 02일(화) 11:58
영등포교회에서 노동주일예배를 드린 후, 참석자들의 모습.(아래에서 세번째줄 좌측 첫번째가 조지송 목사)
영등포산업선교회 3대 총무인 이근복 목사와 현 총무인 손은정 목사.
우리나라 초기 산업화를 주도했던 공장들이 밀집해 있던 서울 영등포. 최근엔 아파트와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서 이전의 정취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소외된 노동자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영등포산업선교회 회관은 지금까지 산업선교 역사의 현장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코로나19로 경제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며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첫발을 내디뎠던 '노동자의 아버지' 조지송 목사의 삶의 자리를 찾아나선 발걸음은 무언가를 간절히 찾기라도 하듯 만감이 교차했다. 한평생 노동자와 함께 '바보들의 행진'을 멈추지 않았던 조지송 목사. 노동자의 아픔에 함께 울고 웃으며 공감했던 그의 삶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길을 보여주는 듯했다.

1970년대 후반, 노동자 소모임에서 대화하는 조지송 목사(우측)와 인명진 목사(좌측).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를 역임했던 이근복 목사와 약속하고 찾은 영등포산업선교회 회관은 노후된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오는 11일 감사예배를 준비하느라 스텝들이 분주한 가운데 영등포산선 현 총무인 손은정 목사의 안내로 지하 1층에 자리한 역사관을 관람할 수 있었다. 아직 준비가 한창이었지만 산선의 산증인 조지송 목사와 인명진 목사 등의 자료들이 일부 전시돼 있어 찾는 이의 가슴을 벅차게 했다.

"사실 조지송 목사가 처음에 회관 건물 짓는 것을 반대했다"는 이근복 목사의 말에 조금은 의아했다. "조 목사님은 건물을 지을 것이 아니라 그 재정으로 교육하고 일을 해야지, 왜 콘크리트 건물에 돈을 투자하느냐며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이해하고 함께 동참했다"는 말에 일평생 노동 현장을 강조했던 그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군사독재 시절엔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집회를 했고 기독청년들이 1박을 하면서 모임도 갖고 노동자들이 쫓겨나면 기거했던 영등포산업선교회 회관. 최근 총회 사적지로 지정돼 산업선교의 역사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1960년대 영등포산업선교회 사무실에서 서류를 검토하는 조지송 목사.
조지송 목사가 걸어온 산업선교의 길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는 쉽게 이해할 수 없으리라. 1933년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난 조지송 목사는 한국전쟁 때 남한으로 피난 내려와 영락교회에 다니며 미군부대 일용 노무원으로 생활했다. 한 미군 장교의 도움으로 신학교와 대학을 졸업한 후, 1963년 경기노회 파송으로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의 산업전도 목사가 됐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초대총무를 맡기 직전에 탄광과 철광 섬유공장과 중공업 공장에서 노동체험을 했던 그는 20년간 한 길만 걸으며 노동현장에서 헌신했다.

1960년대 후반 노동자의 권리나 노동조건을 찾는 것 자체가 사치로 여겼을 때, 그는 노동자가 인간다운 대접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정의가 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노동자와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결심은 열여섯 살이던 순옥이와 만남을 통해 이뤄졌다. 하루는 순옥이와 산선 회관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 어린 소녀는 10리가 넘는 거리를 버스비 절약하려고 걸어서 왔던 것. 밤샘 근무를 끝내고 약속을 지키려고 힘들게 회관까지 걸어온 순옥이를 위해 조 목사는 라면을 끓여주며 버스도 편히 못 탈 만큼 쥐꼬리만 한 월급을 주면서 곱빼기 노동으로 혹사시키는 회사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다고 한다. 그 곳에서 일하고 있을 300여 명의 또 다른 순옥이를 생각하면서 그는 "이런 잔인한 짓을 계속하도록 내버려둬선 안 된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조지송 목사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TIME'지 1977년 1월 3일 자. 유신정권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한국의 산업선교는 외신들에게 한국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비쳤다.
초기에 그는 공장에 가서 설교하고 기숙사에서 성경공부를 이끌며 노동자들을 심방하는 등 전도에 주력했다. "사장 한 사람만 예수를 믿게 성공하면 그 공장 노동자들은 저절로 교회에 나오게 된다"고 생각하며 노동자보다 기업주와의 관계를 더 중요시했다. 하지만 60년대 후반부터 늘어나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바라보며 동떨어진 개인 전도의 한계를 절감한 그는 전도에서 선교로 전환했다. 조지송 평전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노동자들에게는 성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상 치료비가 더 중요하고 제때에 받지 못한 체불임금, 퇴직금, 해고, 구타 등이 당면한 문제라는 사실이 가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산업전도에서 '산업선교'라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하루는 초청 목사의 설교가 한창 진행 중에 노동자 한 사람이 뒤에서 "미친 놈… 자기는 밤새도록 침대에서 잠자고 와서는 밤새워 일한 사람한테 지랄 떠네"라며 욕하는 소릴 옆에서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얼마 후에 3년이나 친하게 지내던 한 노동자의 말은 그를 완전히 바꿔놓은 계기가 됐다. "목사님, 목사님이 사장들하고 어울리고 기업주를 도와주는 설교나 하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이후에 그는 기업주와 사장, 공장장을 설득해 공장예배를 드리는 사역에서 벗어나 작업복 차림으로 직접 노동자를 만나 대화를 하며 노동자의 친구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야근하는 노동자를 만나기 위해 밤 12시나 새벽에도 공장으로 찾아갔다. 노동자가 공순이·공돌이로 불리며 무시당하고 천대받던 시절에 그는 자전거를 타고 야근하는 노동자를 만나기 위해 밤 12시나 새벽에도 공장을 찾아가 그들의 아픔과 애환을 함께 나눴다.

1975년경 당산동 시범아파트 회관 앞에서 실무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부터 인명진 목사, 명노선, 박영혜, 조지송 목사, 우택인 호주 선교사)
그가 펼친 산업선교의 성과 중에 하나는 오랜 방황과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찾아낸 노동조합과의 만남이었다. 조지송 목사 평전에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노동조합을 노동자들의 교회라고 생각했다. 여기(노동조합)에서 인간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민주주의를 배우고, 이웃 사랑과 희생과 봉사를 배우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우며,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서 싸우는 것도 실천적으로 배우고,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은 산업선교 실무자들의 목회 현장이고 노동자 구원의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제 예배 반대로 영등포산업선교회에 대한 교계의 시선이 좋지 않았던 때에 그는 정부로부터도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유신체제에 노동자 억압 정책이 강화되면서 노동자 편에서 일하는 산업선교에 대한 압박이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에 영등포산선 역사에 '소그룹 활동'은 빼놓을 수 없을 만큼 핵심 활동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근복 목사는 "소그룹 활동을 통해 노동자가 스스로 노동문제를 해결해 나갈 뿐만 아니라, 인간됨을 자각하며 보다 공동체에 헌신하는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었고, 나아가 산업선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데 도달할 수 있었다"라며 조지송 목사의 소그룹운동을 평가했다.

조지송 목사는 산업선교를 시작하기전 탄광에서 직접 노동을 경험했다.
여덟 시간 노동제를 노동조건 중에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조 목사는 이 일에도 열정을 쏟았다. 그는 장시간 노동에 치여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생각해볼 틈도 없이 노예와 같은 노동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싶었다. 여덟 시간 노동제와 관련해 평전에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교회가 좀 더 노동자들의 현실을 안다면 이런 비극은 없을 것 아닌가? … 더 이상 바보스럽게 살 수 없다고 항의한 것이 죄가 된단 말인가? 좀 더 바르게 살려고 하면 직장을 빼앗고 옥에 가두고 천대하는 현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가눌 수 없다."

1970년대 사무실에서 조지송 목사.
1982년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산업선교에 대한 탄압은 이전보다 훨씬 치밀하고 집요하게 이뤄졌다. 심지어 "도산(도시산업선교)이 들어오면 도산한다"라는 허무맹랑한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나는 오히려 산업선교가 기업을 돕는다고 본다. (…) 노동자의 정당한 요구를 수용하여 생활이 가능한 적정 임금을 지급하고 인간적 대우와 쾌적한 근무 환경을 만들어 기업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사회적 존경을 받으면 기업에 훨씬 유익하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는 교회를 향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인간의 인격보다 자본과 기술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며, 노동자가 대학 교수나 성직자보다 낮은 계급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인 상식으로 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습니다. (…) 하나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사회 속에서 실증되지 못하는 한 교회의 외침은 아무 효과도 기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노동의 강도는 높고 임금은 낮은 경제 현실에 사는 노동 대중은 모든 문제를 원망의 눈초리로 보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 교회는 무엇으로 그들의 짐을 나누어지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섬기는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1979년 영등포산업선교회관 개관 현수막.
조지송목사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이기도 한 이근복 목사는 "조 목사님은 철저한 분이어서 생활도 검소하고 반듯하며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그러면서 의복은 노동자를 생각하며 허름한 옷만 입고 다녔다"며, "언제나 노동자 편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진실한 분이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한 때, 군사정권과 갈등이 심하고 교회와 갈등이 심했을 때 그를 그만두게 해야 한다는 주문이 있었지만 한경직 목사와 이권찬 방지일 유병관 계효원 목사 등이 앞장서서 그분을 두둔한 것은 그의 진정성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알 수 없는 편두통이 생겨 조기은퇴한 후, 충북 청주 미화면 옥화리에서 생활했다.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났던 그는 음악을 좋아하고 그림도 잘 그렸으며 사진도 잘 찍었다. '바보 대행진' 같은 시도 썼고 '자유찾아 가는 길' 노래도 만들었다. 지난 2020년 1월 22일 그는 평생 노동자와 함께 했던 삶을 멈추고 말았다. 은퇴한 조지송 목사를 생전에 자주 찾았던 영등포산선 총무 손은정 목사는 "목사님은 떠나시기 전에 자신의 장례식도 하지 말라고 부탁할 정도로 자신 보다는 노동자를 우선으로 생각했던 분"이라고 그를 회고했다.

조지송 목사가 직접 만든 노래.
코로나로 가난하고 힘겨워하는 사람들은 늘어나지만 오히려 이들이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예수의 정신과 삶을 되찾는 교회 본질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낮은 자리로 가셔서 가난하고 힘겨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감한 분이었다. 지금 이 시기에 조지송 목사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이 땅에서 노동자의 아픔에 함께 공감했던 그의 삶 때문이리라.


김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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