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따라올 때까지

영혼이 따라올 때까지

[ 논설위원칼럼 ]

박종숙 목사
2023년 06월 19일(월) 08:45
아메리칸 인디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디언을 짐꾼 겸 가이드로 고용한 탐험대가 삼림을 지나는데, 처음 나흘간은 일정에 차질 없이 행군을 계속했다. 그런데 닷새째가 되는 날 느닷없이 인디언들이 전진을 거부했다. 침묵하고 멈추어 섰다. 지쳐서가 아니었다. 회유하고 위협도 해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틀이 지나서야 그들 스스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유를 묻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너무 빨리 걸어왔다. 우리의 영혼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시사하는 바가 큰, 울림이 있는 이야기이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가히 변화의 소용돌이라고나 할까. 앞으로 전개될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10년 후도 예측하기가 어렵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고, 목회 사역을 돕고 있는 부목사님들이 40대 중반인데, 그들에게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한다. 필자가 은퇴할 때까지는 그럭저럭 전통적인 신학과 목회방법론으로 목회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부목사님들이 담임목회를 하게 되는 때는 더 이상 전통적인 그런 것들이 통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고. 그래서 시대의 흐름을 살피면서 철저하게 자신의 목회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난 세기 70~80년대의 경이로운 교회 성장은 이제는 아스라한 역사의 편린으로만 존재한다. 신학이란 것이 그 시대에 유의미한 언어로 복음을 번역하는 작업인데, 우리의 신학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허덕이고 있다. 하물며 그 신학에 바탕을 두고 목회를 하고 있는 목회자들의 의식은 더더욱 그렇다.

절대적인 신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 복음만이 절대적이다. 그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우리 시대의 언어, 우리 시대의 사고의 틀이라는 상대적인 용기 안에 담아내야 한다. 물론 그런 작업에는 언제나 복음의 본질이 변질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이 두려워 사람들은 보수주의와 전통주의를 외치고, 일체의 변화를 거부하는 어리석음을 종종 범하곤 한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면, 신학은 곧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고, 머지않아 생명력을 잃고 도태되고 말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역시 중세 후기 가톨릭 교회의 신학과 근대의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부상한 상공인 계층의 의식과 세계관을 배경으로 해서 형성된 것이다. 너무 성급하게 시대의 변화에 끌려가서는 안 되지만, 세상의 변화, 시대의 변화에 눈 감고 있어서는 더더욱 아니 될 것이다. 치열한 고민과 기도가 있어야 한다. 세상을 이해하는 지성과 함께, 세상을 이끌어갈 수 있는 영성이 교회 안에, 신학 안에 담겨 있어야 한다. 신학교 교육부터 새로워져야 한다. 신학교육 프로그램이 구태의연한 것이어서는 살아남기 힘들다. 교수와 학생들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함께 기도하며,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신학적 대안을 모색해 나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목회자들 역시 이 시대에 호소력이 있는 새로운 목회방법론을 찾아야 한다.

곧 교회에서 그리스와 튀르키예 성지 순례를 갈 예정이다. 순례 일정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 방문도 들어 있다. 천 년 이상의 세월 동안 세상과 담을 쌓고 오직 하늘과만 소통하고자 했던 정교회의 수도사들. 그들은 무엇을 추구하며 무엇을 이상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오늘 세상 속의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디언들의 이야기는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면 자칫 영혼 없는 세상을 살 수도 있다는 암시를 던져준다.

모든 것이 기계화되고, 물질화되고, 고삐 풀린 말처럼 폭주하는 세상, 이 세상 속에서 교회의 자리는 어디인가? 교회가 전할 복음은 무엇인가? 변해야 할 것과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은 무엇인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목회자의 자리는 참 버겁고 힘들다. 성령이여, 도우소서!

박종숙 목사 / 전주중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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