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자유'

[ 논설위원칼럼 ]

김영권 총장
2022년 05월 30일(월) 10:00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례적인 형식의 취임연설이었다는 평가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취임연설이 향후 새 정부가 갖는 비전을 나누는 데 초점이 있었던 것과는 그 형식이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정부 취임연설에서 앞다투어 관심을 보인 35번 언급된 '자유'라는 단어는 분명히 비전과 무관하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그 '자유'에는 어떤 비전을 담고 있는 것일까?

연설의 맥락에 비춰볼 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혁신과 번영과 성장에 의한 '보편적 자유'를 시민의식으로 "국제사회에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나라"를 그 방향에 두고 있다. 우리 사회는 줄곧 '공정'을 강조하며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과 개개인에게 사회적으로 가능한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간의 균형을 강조해왔다. 사회적 전제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보편적 자유는 반드시 공허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니 말이다.

'자유'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인류 최초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 의지' 역시 인간의 자유가 갖는 필수불가결성을 말해준다. 하지만 자유가 판타지로 이해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종종 경계의 상징으로서 '울타리'를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 '울타리'는 보호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통제하기 위한 장치라 할 수도 있다. 보호는 자유권을 보장하는 것이지만, 통제는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최초 인간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말씀하셨다. 소위 '울타리'를 두른 셈이다. 이 '울타리'는 '보호'를 뜻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통제'를 뜻하는가? 자유의 보장인가 침해인가? 간교한 뱀은 이를 '통제'의 관점에서 읽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창3:5)게 될 것에 대한 경계로 해석했다.

자유는 양날의 검과도 같다. 비단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그리스도인에게서 조차도 '자유'의 왜곡을 낳는 사례는 흔히 발견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자유의 본질에서의 왜곡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10:23). 자유권의 남용은 자칫 자유의 본질을 파괴한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는 진리 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선물(요8:32)이라는 이해를 요구한다.

1520년에 이른바 세 개의 '종교개혁 논문'을 발표한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해서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만물에게 예속된다"라는 짧은 글에서 주인과 종의 대립명제를 남겼다. 이는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자유의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고자 모든 사람의 종이 된 바울 사도의 고백(고전9:19)과도 맥을 같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는 역설이다.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은 자유는 동시에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의 윤리를 낳는다.

의인이면서 자유인인 우리는 죄인이면서 종의 윤리를 통해 자유를 이뤄간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해석의 복잡성이 존재한다. 내적인간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종의 윤리를 지향한다 할지라도 세상의 권위나 체제에 복종을 정당화하는 체계로 악용되어서도, 내적 자유가 현실에서의 부자유를 지지하는 듯이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현실에서의 자유를 위해 내적 자유가 관용을 베풀며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게 해서도 안 될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의 내적 자유를 순수 내적 자유로 해석해 현실세계에 무관심, 무책임, 무의미로 반응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자유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시민사회에 이뤄내는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자유로 나아가기에 극복해야 할 개념상의 많은 한계를 가진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교회는 이 시대의 대안사회라 하지 않는가.



김영권 총장 / 대전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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