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누가 헌금 하는가?

이제는 누가 헌금 하는가?

[ 논설위원칼럼 ]

이대근 목사
2022년 05월 02일(월) 08:30
누가 헌금을 많이 했는가? 예수님은 이 질문에 이상한 답변을 하셨다.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헌금했다."(막12장과 눅21장 참조) 하지만 만약 그 당시 성전에 회계가 있어서 집계를 했다면 수치상으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성전을 관리하는 면에 있어서는 그 과부의 헌금이 많이 기여했다고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교회들에서 누가 헌금을 많이 했는가? 수치상으로 따지면 대략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자들이, 그리고 베이비붐 세대들이. 물론 돈이 많다고 반드시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부자가 됐으니 교회를 위해, 선교를 위해 헌금하겠노라', 이런 마음으로 헌금한 경우 그 금액은 상당하다. 적어도 수치상으로는 그렇다. 또한 한국교회의 외형적 성장기에 신앙을 배웠던 세대들이 베이비붐 세대가 아닌가. 부흥사들마다 헌금을 신앙의 척도로 강조했으며 실제로 교회 건축과 각종 사역을 위해 상당한 금액의 헌금이 필요했다. 베이비붐 세대가 땀흘려 일하고 거둔 열매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외형이 자리 잡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 부자도 별로 없고 베이비붐 세대도 은퇴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될까? 이제는 누가 헌금을 하겠는가? 교회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인 문제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돈은 걱정하지 말라.' 이 말이 믿음의 고백이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말이 회자되던 시절은 한국교회의 외형적 성장기였다. 이제는 그게 통하지 않는 교회들도 많이 목격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가난한 과부'의 헌금으로는 교회 건물의 공과금을 내는 것도 버거워질 지경이다.

다른 목사님들과 의견을 나누다 보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시는 분들도 있다. 예를 들어, 교회를 지을 때 아예 주상복합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교상복합(敎商複合)'의 개념을 도입하면 저층의 상가에서 거둔 임대료 수입으로 헌금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취지다. 귀가 솔깃하다. 헌금이 없다면 문을 닫아야 하는 현재의 구조로서는 얼마나 획기적인 방안인가? 교회의 수익사업에 대한 경계라든가 교회의 품위 운운은 작게 들린다. 게다가 코로나로 헌금 총액이 줄어드는 것을 경험했던 교회들로서는 대안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다. 목회자의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결코 작게 들리지 않는다. 아예 이중직을 실행중인 분들도 꽤 있다.

정답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베이비붐 세대처럼 충성스럽게 봉사하고 헌금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며 교회들 사이의 빈익빈 부익부를 좁히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다음세대들이 베이비붐 세대처럼 헌금할 것을 기대하지 못하는건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건 당연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도 당연하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지닌 특성을 이해하는 것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시작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십일조나 절기헌금 같은 '정기적'인 헌금은 소극적이지만, 그들의 자녀세대들을 위한 '후원'으로서의 헌금은 그래도 적극적이다. 다음세대의 특정 시설을 확충한다든가, 또는 여러 행사들을 위해 그때마다 헌금을 독려하는 것은 하나의 방법이 될수 있다. 목적과 사용처가 분명해야 헌금에 참여하는 세대의 특성을 교회가 이해해야 한다.

헌금 바구니만 돌리고 기도하면 교회의 재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교회가 얼마나 존재하겠는가?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것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길이 될 것이다. '과부'의 마음으로 헌금하되, 바울처럼 성도들에게 부담주지 않는 방법도 찾아야할 것이다.

이대근 목사 / 양정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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