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투인가? 헤나인가?

타투인가? 헤나인가?

[ 논설위원칼럼 ]

이정우 목사
2022년 01월 03일(월) 10:08
문신(타투)이란 文(글월 문) 身(몸신) 즉, '몸에 글을 새기다'란 뜻이다. 헤나도 몸에 글(그림)을 그리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타투(문신)는 바늘을 이용하여 피부 안(진피층)에 전용 잉크를 주입하여 영구적으로 그림이나 글씨를 새기는 것이다. 헤나는 피부 표면(표피층)에 염색하여 그림 혹은 글씨를 새기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투(문신)는 평생 지워지지 않지만, 헤나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지워진다는 차이가 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몸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이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타'라고 한다. 스티그마타란 주인이 자기의 소유임을 확증하려고 말이나 소의 엉덩이에 불로 달군 쇠로 찍어 표시하는 흔적이다. 이것이야 말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라고 고백했다.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에 승리하기 위해서 많은 상처를 입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 받은 흔적에 대해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고후 11:23~25)라고 했다. 바울은 유대인들과 적당히 타협했더라면 이런 흔적 없는 평탄한 길을 갈 수도 있었으나 복음과 사명을 위해 그의 진피 속까지 십자가의 흔적으로 수놓았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고백한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던 담대한 외침 속에 담겨 있는 영적 의미는 "내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다"(고전 11:1)라는 메아리로 마음에 와 닿는다.

이런 흔적이 성도의 몸에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를 자랑한다. 십자가는 사형 틀이다.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십자가의 흔적이 있는 사람은 세속의 영화를 배설물처럼 취급한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삶이야말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며, 영광의 상처가 되어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런 예수의 흔적이 영원한 문신인 줄 알았는데 일시적 헤나처럼 사라진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우리 주위에 진짜처럼 보이는 십자가의 흔적이 헤나가 되어 지워지는 일이 많다. 충성 봉사할 때는 그 흔적이 문신인 줄 알았는데 그 직을 떠난 후에는 예수의 흔적이 헤나처럼 사라져버린 사람이 많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또 다른 아픔의 흔적이다.

우리의 아픔은 교회의 십자가 속에 십자가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 속에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구원의 복음 속에 복음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번 돌아보아야 한다. 오늘까지 내가 지녔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그 예수의 흔적, 그 십자가의 흔적이 영원한 문신인가? 일시적 헤나인가? 오늘날 교회는 십자가의 흔적을 거부한다. 오직 번영과 영광과 축복만을 소원하고 있다. 십자가의 흔적이 없이는 교회의 영광은 없다.

우리는 2022년 새해를 맞이했다. 진피 즉 피부 속에 영원히 새겨질 예수의 십자가 흔적을 수놓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정우 목사 /안동서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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