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환자 함께 산 자유인, 최흥종

나환자 함께 산 자유인, 최흥종

[ 한국교회인물열전 ] 8. 무등산의 성자, 한센인의 아버지 오방 최흥종

김성진 기자 ksj@pckworld.com
2021년 11월 29일(월) 11:24
【광주=김성진 기자】 평일임에도 무등산 등산로에는 등산객들로 무척 붐볐다. '비할 데 없이 높은 산'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라는 뜻을 가진 무등산은 유난히 아름다운 산세를 품고 있었다. '한국교회 인물열전'의 마지막 인물로 '무등산의 성자'이며 '한센인의 아버지'로 불린 오방 최흥종 목사의 삶의 자리를 찾았다. 그가 무등산 기슭에 움막을 짓고 생활했던 '신림 기도처'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번 취재엔 전남노회 역사위원회 서기 오만균 목사(광주호산나교회)가 동행했다.

증심사로 가는 길에서 옆길로 조금만 올라가면 오방 최흥종 목사가 자유를 선언하며 기거했던 '신림 기도처'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담한 현대식 건물로 신림교회 '오방수련원'이라는 팻말이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옛날에는 움막으로 지어졌는데 그 움막이 없어지고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옛날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오만균 목사는 역사적인 가치를 오랫동안 간직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사람의 삶을 평가하기 위해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오방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광주지역 최초의 기독교 신자, 최초의 장로, 최초의 목사, 최초의 러시아 파견 선교사, 최초의 구라운동가, 최초의 빈민구제운동가, 최초의 거세수술' 등 여럿이다. 25세의 늦은 나이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그는 나환자를 돌봐주던 포사이드 선교사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고 나환자를 돕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1880년 광주에서 태어난 최흥종은 젊은 시절 '최망치'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방황하는 삶을 살았다. 25세 때, 유진 벨 선교사와 인연으로 방황하던 삶을 멈추고 광주에서 첫 교인이 됐다. 한때 광주 경무청 순검 생활을 했던 그는 화순에서 일본군 몰래 체포된 의병 12명을 풀어준 것을 계기로 순검 생활을 그만두게 됐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주 특별한 사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1909년 4월 포사이드 선교사를 만나면서 최흥종의 삶은 완전히 변화됐습니다." 오 목사는 최흥종과 포사이드 선교사의 만남을 중요하게 소개했다. 목포에서 의료선교를 하던 포사이드 선교사가 폐렴으로 사경을 헤매이던 오웬 선교사를 치료하기 위해 광주로 오게 됐다. 최흥종이 마중을 나갔는데 그곳에서 포사이드 선교사는 추위에 떨고 있는 한 나병 환자를 발견하고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입혀줬다. 그리고 자신이 타고 있던 나귀에 그 나병 환자를 태우고 자신은 나귀를 끄는 모습에 최흥종은 충격을 받았다. 잠시 후, 그 여인은 힘이 들었는지, 들고 있던 지팡이를 길바닥에 떨어뜨렸다. 이것을 본 선교사는 최흥종에게 빨리 지팡이를 집어달라고 재촉했다. 순간 최흥종은 병이 자신에게 옮길 수 있다는 생각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피가 다른 외국 사람도 자기가 입고 있는 외투를 벗어주고 스스로 여인을 안아서 자신이 타고 온 나귀에 태웠는데, 같은 동포인 내가 지팡이 하나쯤 집어주지 않는다면 외국인 앞에서 무슨 망신인가." 그는 그런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아서 지팡이를 집어 나귀에 타고 있는 여인에게 건네 주었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그 여인을 선교사촌으로 데리고 가서 가족처럼 돌봐줬고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예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됐다"며 최흥종이 변화된 삶을 살게 된 계기를 소개했다.

이후, 그는 날마다 선교사촌에 나가게 됐고 나환자를 위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1912년 최흥종은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땅 1000평에 요양원을 설립했다. 그는 윌슨 의사로부터 4년 동안 지도받은 의료기술로 나환자 치료에 전념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나환자 전문병원인 광주 나병원의 출발이 됐다. 이 무렵 최흥종은 독일 간호사 서서평 선교사를 만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걸인들을 모아 걸인촌을 만들어 밥을 해 먹이는가 하면 거리를 방황하는 나환자들을 수용해 돌봤다. 그러자 전국의 나환자들이 광주로 몰려오게 됐으며 광주시민들로부터 "광주를 나병환자 소굴로 만들셈이냐"는 빗발치는 항의를 받았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광주 나병원을 율촌으로 옮겼는데, 이곳이 지금의 여수 애양원이 됐다.

1912년 북문안교회의 첫 장로가 됐던 그는 1914년 평양신학교에서 수업을 시작했다. 1919년엔 3.1만세사건에 연루돼 1년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1년 광주에서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고 중앙교회(당시 북문밖교회) 초대 목사로 취임했다. 1922년 광주에서 최초로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송되기도 했다. 귀국 후엔 소작법개정운동을 전개했고 1926년에는 노동조합연합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해방후엔 건국준비위원회의 전남위원장으로 추대됐다.

누구보다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가 55세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유인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보다 불행한 이웃을 위해 철저하게 개인의 욕심을 버렸다. 그가 무질서와 무책임, 방종과 방황을 의미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만세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가 독립운동가들의 변절과 기독교계의 신사참배 결의에 실망하고 스스로 사망선고를 내린 뒤 무등산 자락으로 들어갔다. 물론 함께 사역했던 서서평 선교사의 죽음도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1935년 그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거세 수술을 받고 내려와 3월 17일 스스로 본인의 사망통고서를 주위 사람들에게 발송했다. "1935년 3월 17일 이후, 나 오방 최흥종은 죽은 사람임을 알리는 바입니다. 인간 최흥종은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차후에 거리에서 나를 만나거든 아는 체를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최흥종은 오늘부터 이 지상에서 영원히 떠나 하나님 품에 진실로 하나님과 함께 자유롭게 살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바랄 뿐입니다. 본인을 사망자로 간주하시고 친한친구 명부에서 삭제하여 주시기 복망하나이다. 가정에 대하여 방만자, 사회에 대해 방일자, 사업에 대해 방종자, 국가에 대해 방기자, 종교에 대해 방랑자, 소위 오방을 제창하면서 명실히 불합한 가면극이 왕왕 연출돼 양심상 사이비한 생활을 절실히 참회하고 무익한 죄인이 세사에 간여하는 것은 유익보다 폐해가 더 될 것을 각오하므로."

이처럼 오방은 다섯 가지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한다. △가족의 정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속받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경제적으로 속박 받지 않으며 △종파를 초월해 정한 곳 없이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5가지 신조를 평생 지키며 살았다. 육적인 죽음을 선포한 그는 집을 나와 사방을 판자로 막은 손수레를 만들어 '유산각'이라 이름 붙여 끌고 다니며 거리에서 걸인들과 함께 살았다. 그러면서 나주 산포에 음성나환자 자활촌 '호혜원'을 설립하고 증심사 입구에 빈민자활촌 '삼애원'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원효사 골짜기에 결핵환자 요양촌 '무등원'을, 지산동 골짜기에 '송등원'을 세웠다. 그 자신도 무등원 안에 '복음당'이라는 토담집을 짓고 결핵환자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1966년 2월 10일, 최흥종은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여한이 없다'면서 단식에 들어갔다. 단식 90일을 마치고 닷새 후인 1966년 5월 14일 그는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그때 장례식을 떠올리는 오만균 목사는 "광주 인근에서 몰려온 걸인들과 무등산에서 내려온 결핵환자들, 나주 호혜원과 여수 애양원에서 온 음성나환자 등 수백명이 몰려와서 그를 애도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하며 땅을 치고 통곡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가 이 땅에서 성자로 살았던 삶을 되새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오방 최흥종 목사가 세상을 떠나자 광주시가 사회장을 거행했고 독립운동가로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오방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이 써준 휘호처럼 '화광동진'의 삶을 산 '영원한 자유인'이었다.

광주 양림동에는 '오방 최흥종 기념관'이 큰 규모를 자랑하며 자리하고 있다. '새벽의 빛' '여정의 시작' '신행일치의 길' '영원한 자유인' 등으로 구성된 기념관은 그와 관련된 사진과 유품 등이 전시돼 있었다. 그곳에는 최흥종을 이렇게 소개했다. "광주의 첫 장로이자 목사로 한평생을 한센병(나병)퇴치와 빈민구제, 독립운동, 선교활동, 교육운동 등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개화기 광주의 정신적 지주이자 근대 광주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기독교계 보다 사회가 먼저 그를 존경하고 기념했다.

그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예장 총회는 '오방 수련원'을 한국기독교사적 제35호로 지정했다.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고 있는 이 시대에 최흥종 목사는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앞서 삶으로 보여줬다. 오방 최흥종 목사에 관한 한 저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최흥종은 광주 지역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땅 전체에서 유력한 인물이었다… 그는 20세기 한국의 가장 큰 영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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