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언어로 읽느냐?

어떤 언어로 읽느냐?

[ 논설위원칼럼 ]

남정우 목사
2021년 10월 18일(월) 09:24
한국교회가 위기다. 개혁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이 시대 올바른 개혁 방향과 동력을 찾아낼 수 있을까? 매년 다가오는 10월 말 종교개혁 기념주일 설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16세기 종교개혁의 배경이 성경을 다른 언어로 읽고 연구하고 묵상한데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면서, 지금 이 시대 교회 개혁운동의 실마리도 '다른 언어', '다음 세대의 언어'로 성경을 새롭게 읽는 데서부터 찾아야 함을 배운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 중에 중요한 사실은 5세기 초에 번역된 라틴어성경(Vulgate)을 천년 동안 변함없이 읽어오다가 15세기 말부터 히브리어, 헬라어로 된 성경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른 언어로 읽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관점의 변화를 일으켰다. 관점이 달라질 때 변화가 시작된다.

같은 성경이지만, 어떤 언어로 읽느냐에 따라서 상상하는 것이 달라지고 이해하는 것이 달라지고 적용하는 것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읽게 되는데, '세상'을 나타내는 단어를 어떤 언어로 읽느냐에 따라서 세상의 범위와 크기가 다르게 그려지고, 인류에 대한 이해도 달라진다. 헬라어 'kosmos(코스모스)'라고 읽을 때 세상은 주로 지중해 연안의 세계를 의미했다. 라틴어 'mundus(문두스)'라고 읽을 때, 그 세상에는 동아시아 호주 아메리카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로마제국이 곧 세상이었다. 로마제국 밖의 세계는 세상 밖이었다. 지금 우리가 영어 성경에서 'World(세계)'라고 읽을 때와는 그 내용이 많이 달랐다.

특별히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이 라틴어 성경에서는 "fides(피데스), spes(스페스), caritas(카리타스)"라고 되어 있다. 중세시대 유럽 천주교 성직자들과 일반 신도들은 천년동안 '사랑'을 '카리타스'로 읽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실생활 속에서는 사랑(caritas)이 '자선(charity)'으로 이해되었으며, 이것이 곧 선행(善行)을 통한 구원론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라틴어로 성경을 읽는 동안에는 이러한 사상과 교리의 발전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헬라어 성경을 읽기 시작하니, 사랑이 '아가페'로 읽혀진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초월적인 사랑으로 이해된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서 제일인 사랑이 인간의 선행으로 읽혀지지 않고, 하나님의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자, 눈이 번쩍 뜨이게 된 것이다. 초점이 '인간의 수고'(카리타스)에서 '하나님의 수고'(아가페)로 옮겨가게 되면서, 십자가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부각되었다. 그러자 그동안 신앙생활의 중심을 차지해온 인간의 일들이 뒤로 물러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이 중심을 차지하면서 교회개혁과 신앙생활의 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언어는 세계관을 형성한다. 세계관은 가치관을 만들고, 가치관이 개인적으로는 행동패턴을 만들고, 집단적으로는 문화를 만들고 세상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려면 언어를 달리해야 한다. 다른 언어로 읽는 연습을 시작할 때 다른 세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성경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고 물으신다.(눅10:26). 우리는 지금 어떤 성경을 읽고 있으며, 어떤 언어로 읽고 있는가? 개혁은 지금까지 익숙한 언어를 잠시 내려놓고 다른 언어로 읽기 시작할 때 시작됨을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쳐준다.



남정우 목사 / 하늘담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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