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 논설위원칼럼 ]

김선욱 교수
2021년 09월 20일(월) 08:25
아비멜렉의 만행에서 살아남은 요담은 세겜 사람들을 향해 절규하며 정치적 비유 하나를 던진다. 이 비유에서 나무들은 자신의 왕을 세우려고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를 만난다. 이 세 나무는 각각 자신의 기름이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서, 자신의 달고 아름다운 열매를 버릴 수 없어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신의 포도주를 버릴 수 없어서 왕이 되기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우쭐대는 길을 선택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무들은 가시나무를 찾아가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가시나무는 모두 자기 밑으로 오라고, 그렇지 않으면 다 불살라 버리겠다고 했다.

정치철학자로서 필자는 사사기 9장에 나오는 이 비유가 유감스러웠다.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왜 요청을 거절했을까? 가시나무의 지배를 받으며 그들은 행복할 수 있었을까? 다른 나무들의 고통을 보면서도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한다고 생각한 자신의 일에 충실할 수 있었을까? 그런 식으로 자기 일에 충실한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일까?

또, 왕이 되는 것은 우쭐댈만한 일인가? 우쭐대기가 지도자의 핵심이나 본질인가?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우쭐대지 않는 왕으로 나설 수는 없었을까?

오늘의 지도자는 왕도 지배자도 아니다. 민주공화국에서 정치지도자는 시민을 대표하여 다른 이들과 협력하여 국가를 경영하는 자다. 왕권 혹은 왕국 개념이 기독교인의 정치적 상상력을 지배하기에, 신앙인에게는 지배나 통치, 다스림 같은 개념을 떠나 정치를 생각하기가 어려운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인식과 문화의 변화는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교단에는 총회가 이루어지고, 세속에는 대선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불을 뿜는 가시나무의 정치가 아니라 생명의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에는 죽임의 정치가 횡행했다. 그보다 나아진 지금도 여전히 불통의 정치, 상극의 정치가 압도적이다. 상생과 생명의 정치는 아직 거리가 멀어 보인다.

지금은 천국에 계신 장인과 2010년대 뒷자락에 가졌던 대화가 기억난다. 당시 한국 정치는 소란스러웠다. 장인은 정치에 대해 여러 말씀을 하시던 중 갑자기 과거 일을 떠올리셨다. 일본 강점기에 강제징집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 일하면서 공부하신 이야기, 전쟁이 끝나기 직전 귀국하여 해방 후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하신 이야기, 해방과 전쟁의 혼란기에 목회자로서 지역 정치를 도와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돌보시던 이야기. 이 시절들을 회상하시다가 갑자기 장인은 눈물을 글썽이고 울먹이며 이런 추임새를 넣으셨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당신에게 한국의 역사는 혼란 속에서도 꾸준히 진보를 일구신 하나님의 역사였고, 혼란스럽던 2010년대는 그 진보의 열매를 먹던 시기였다. 그때 장인의 한 마디는 내게 벼락처럼 감사를 일깨웠다.

'꼰대' 소리를 들을 나이가 된 지금의 나도 이제는 과거를 길게 보게 되고, 그 긴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읽으며,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오늘의 정치도 혼란스럽고 소란스럽다. 그래도 우리의 세속 역사와 정치에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이렇게 권하게 된다. "우리의 정치에 대해 감사에서 시작합시다."





김선욱 교수 / 숭실대학교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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