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하나님, 비밀녹음의 인간

기록의 하나님, 비밀녹음의 인간

[ 논설위원칼럼 ]

오시영 장로
2021년 06월 14일(월) 09:36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기록에 있다. 기록은 시간 속에서 역사로 승화되고,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침과 교훈으로 기능한다. 하나님은 창세 이래 심판의 마지막 날까지를 창세기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으로 마무리하며 기록하였다. 기록 앞에 인간이 겸손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과학기술의 발전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우리 인간이 대행할 수 있다며 교만케 한다. 기록의 시대는 이제 피사, 촬영의 시대로 발전하였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세상이 되었다. 하나님 기록의 위대하심을, 수많은 인간이 자신 손의 영사기로 찍고 또 찍고, 그 대가로 찍히고 또 찍히며 대체하려 한다. 하나님의 심판에 앞서 인간이 인간을 먼저 심판하는 세상이 되었다. 하찮은 잘못마저 용서되지 않는 송곳의 시대가 되었다. 수많은 CCTV, 자동차의 블랙박스, 개인 모바일폰, 드론과 인공위성이 우리를 하루에도 수없이 촬영하고 기록한다. 녹화되고 녹음된다.

법조인이라는 직업상 일반인에 비해 더 자주 경험하는 것이 법정에 너무나 많은 녹음, 녹화 파일이 증거로 제출되는 현상이다. 예전에는 계약서 같은 서류가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면 지금은 생생한 현장 화면 파일 아니면 감성과 의지가 녹아 있는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은밀한 대화 내용이 녹취된 음성 파일이 그 기능을 대체하고 있다. 일상의 모든 전화와 대화를 녹음하는 편집증 환자마저 양산되고 있다. 아무런 분쟁이 없는 평화로운 인간관계에 있을 때조차 부지불식간에 도촬과 비밀녹음의 대상자로 전락하고 있는 현대인은, 그래서 불안하고 초조하다.

도끼에 찍히는 나무는 쓰러지게 마련이고, 직장의 상사나 주변의 누군가에게 찍히면 언젠가는 고통을 받게 되어 있다. 예수님마저도 제자 가룟 유다에게 찍히고, 유대의 잘못된 종교지도자에게 찍히고, 로마의 공권력에 찍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였다. 약간의 위선은 인간을 조금이나마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순기능이 있다. 하지만 녹화된 현실은 모든 인간을 초라한 위선자, 명확한 위선자로 추락시킨다. 그래서 존경받는 어른이 사라져버린, 홀로 잘난 외톨이 인간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더불어 삶이 아닌, 홀로 골방지기가 되어 자기가 찍히는 것만큼 타인을 찍는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네가 나를 찍어 공격하면, 나도 너를 찍어 공격하겠다는 무방어 맹공격의 잔혹한 세상으로 변해버렸다.

우리 기독인이 더욱 예수닮기에 진력해야 하는 까닭이다. 말이 아닌 행함으로 우리 스스로를 또박또박 기록하는 자기 성찰의 실천자가 되어 밤하늘 별이 되어야 한다. 밤하늘이 어두울수록 빛을 발하고,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 위의 대상에게도,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선원에게도 살아 있는 안내자이자 희망이 되는 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오늘 하루 선하게 살면 그것이 하나님께 기록될 것이다. 아무리 찬송과 기도를 하고, 성경 말씀을 묵상한들 우리의 삶이 선하지 않으면, 세상 탐욕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헛된 기록이 되어 우리를 더욱 옥죄는 올무가 될 뿐이다.

하나님께 기록되는 것은 참 쉽다. 세상을 살면 살수록 그 비법이 단 한 가지뿐임을 선명하게 깨닫게 된다. 그냥 마음을 비우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다. 정말 그냥 착하고 선하게 살면 된다. 화를 낼 것도 없고, 남을 미워할 것도 없고, 설득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하겠다고 아등바등할 것도 없다. 생각이 다른 타인을 어떻게 우리의 말 한 마디로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그냥 빙긋 웃으며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해 주신다. 오늘 하루도 어떻게 하면 빙긋 웃을까 그 생각 하나면 족하다. 하나님, 오늘도 나를 기록해 주세요. 아멘.



오시영 장로 / 상도중앙교회·전 숭실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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