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전령사로 세계교회를 섬기다

복음의 전령사로 세계교회를 섬기다

[ 기획 ] 비전교회 정도출 목사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7년 02월 20일(월) 17:12
▲ 필리핀 로스바뇨스교회 교인들이 한국에서 방문한 비전교회 교인들을 환영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발전에 있어 부흥사의 역할은 너무나 자주 간과되곤 한다. 한국교회 초기 부흥사들은 생활에 지치고 말씀에 갈급한 이들에게 꿀송이 같이 말씀으로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나라를 잃고 절망하던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독립에 대한 꿈을 되찾게 했다. 그리고 해방된 국민들에게는 가난을 이겨내고 경제성장을 일구는데 힘찬 동력이 됐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 부모 세대와 선배들의 희망과 신앙이 결합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울강동노회 소속의 정도출 목사(비전교회)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인이며, 동시에 대표적인 부흥사로서 한국교회 성장을 이끌었던 선배 부흥사들의 맥을 잇는 인물이다. 정 목사는 서울 법대를 졸업하고 법대 교수를 꿈꾸었지만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다. 정 목사는 지금까지 3000곳이 넘는 교회의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한국 최고의 부흥사 중 한 명인 신현균 목사(1927.12.13 -2006.5.7) 이후 가장 많은 부흥회 설교를 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81년 신대원 1학년 때 개포동 들판에 교회를 개척한 후 한달도 지나기 전부터 부흥강사로 초빙을 받았다는 정 목사는 지난 36년여의 목회 기간 중 거의 매주 한차례, 많게는 두차례의 부흥회를 이끌어 왔다. 

▲ 정도출 목사.

'도출(道出)'이라는 자신의 이름 그대로 '세상에 나가서 진리를 전하는 사람', 다시 말하면 부흥사가 된 데에는 태어나면서부터 난산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순간 그의 아버지가 목숨만 살려주시면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한 기도에서부터 그 기원이 거슬러올라간다.

천신만고 끝에 세상의 빛을 보기는 했어도 어린 시절 몸이 너무 허약해 어린 도출은 유소년 시절 누워서 지나다시피했다. 초등학교도 동급생이 날마다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 주어야 했을 정도로 연약했던 생명이었다. 겨우 중학교에 진학했던 그는 갑작스런 집안의 경제상황 악화로 고등학교 진학도 학원장학재단의 장학생 선발시험에 응모해 장학금 수혜가 확정된 후에야 진학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울대 합격을 해야 학비가 나온다는 이야기에 혼자서 대구에 올라가 교회의 기도실에서 숙식하며, 명문고를 다니는 교회의 친구들에게 동냥을 하듯 배움을 청하는 등 악착같이 공부를 한 끝에 기적적으로 서울대 법대에 합격을 할 정도로 명석한 두뇌와 포기하지 않는 인내를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 깃든 신앙에 대한 깊은 회의로 인해 교회 내 교회파괴자가 되어 짧은 방황을 하기도 했다. 목회자로 한국교회에 바치겠다는 아버지의 서원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 법학과 교수로서의 인생을 계획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에 정 목사가 꼭 필요했던 모양이다. 신앙을 잃고 방황하던 청년 도출에게 간이 곪고 썩어서 혼수상태에 빠져 생명을 잃는 '간 혼수'라는 병이 엄습한 것. 갑자기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진 가운데 죽음이 임박했을 때 예수님은 환상 가운데 그를 찾아가 안아주셨다. 그 이후 정 목사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가 되기 위해 신대원에 입학해 공부하는 중 그는 더 깊은 앎을 위해 유학을 계획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에게 유학이 아닌 교회개척을 명했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개포동 허허벌판에 교회를 개척한 정 목사는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한 명의 교인을 만들기 위해 밤낮 없이 전도에 매진했다. 그의 체험과 이력, 말씀에 대한 열정이 입소문을 거치면서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이 오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 목사는 한 교회만을 섬기던 목사에서 한국 전역과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부흥사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왔다.

▲ 1981년 개포동의 한 야산에서 드려진 비전교회 첫 예배.

명실공히 인기 부흥강사가 되어 전국 각지의 교회로부터 부흥회 인도를 부탁받지만 그는 큰 교회와 작은 교회를 가리지 않고 먼저 연락이 온 교회부터 간다는 원칙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정 목사는 "교회 규모를 따지지 않는 내 원칙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와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작은 교회, 농촌교회, 자립대상교회들의 애환을 청취하면서 한국교회의 밑바닥 정서, 교인들의 간절한 여망을 알게 됐다"며 "이러한 경험 속에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부흥사로서 목회자의 사명을 마치려 했던 그는 10여년 전부터 선배 목사들로부터 총회를 섬기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며, 부흥사로서의 영성과 법 전공자의 법학지식 등을 총회를 위해 사용할 것을 권유받았다. 이에 그는 총회 헌법위원회, 재판국, 규칙부 등을 거치며 장로교회의 대의정치와 법치주의가 총회 내 바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힘써 왔다. 

정 목사는 "총회가 공교회적인 유익을 구해야 하는데 몇 사람의 개인적 이해관계에 왔다갔다 하는 총회가 되어서는 안된다"며 "법이 흔들리면 총회는 총회장이 바뀔 때마다 일관성이 없어질 수 있다. 시스템 총회가 매뉴얼화 되기 위해서는 법치가 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총회의 '법통'인 그는 지난 2011년 제96회 총회에서는 부회록서기로서 총회 임원의 중책을 맡기도 했다.

부흥사의 영성과 대의정치ㆍ법치주의를 강조하는 그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배우는 목회자이기도 하다. 전국 부흥회를 다니면서 작은 교회의 애환을 직접 느꼈기 때문에 개척을 해서 교회를 성장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제왕적 목회를 지양하고 섬기는 목회를 지향하고 있다. 그의 주변인들은 그가 엘리트임에도 불구하고 서민적 정서를 가진 목회자라고 입을 모은다. 또한, 그는 강동지역 개발 당시 많은 교회들이 지역에 들어오면서 교회와 지역정부와의 갈등, 대교단과 군소교단 교회의 갈등이 생기는 것을 보고 지역교회를 기반으로 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지역 내 교회연합운동을 앞장서 실천해오고 있다. 이 또한, 작은 교회가 바로서고 건강하게 성장해야 한국교회 전체가 살아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들로 인해 그는 교단의 작은 교회들에 대한 애정이 그 누구보다 깊다.

"지금 한국교회는 바닥의 마음을 총회에 전하고 총회의 정책에 영성을 담아 개교회까지 전하는 지도자의 역할이 정말 필요할 때입니다. 작은 교회를 살리고, 그들이 총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 받고 있다는 안정감을 주어야 합니다. 동시에 제 마지막 사명은 작지만 건강한 교회가 서로 연합하여 세계선교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의 띠를 더 단단하게 묶는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3,000여 회 이상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한국교회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저는 그저 쓰임받는 도구가 되길 기도 드릴 뿐입니다."

 

#"지상명령 실천, 작은 교회부터"
100명당 선교사 1명 파송 강조하는 정도출 목사

▲ 비전교회 후원으로 이뤄진 미얀마 난민들을 위한 교회 건축.

"선교사를 보내야 합니다. 이 교회를 세울 때 분명히 하나님께서 세례교인 100명이 되면 선교사 한 명을 파송하라고 하셨어요. 그러니 그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1981년 교회를 개척하고 3년만에 교인이 2백 명이 되자 교인들 앞에서 정도출 목사가 한 이야기였다. 몇년째 목사 사례비도 제대로 주지 못할 정도로 빠듯한 재정 형편의 교회에서 목사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자 교인들은 난색을 표하며 반대했다. 

교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자 정 목사에게 다시 병마가 찾아왔다. 수개월의 사투 끝에 일어나 비싼 교훈을 얻은 그는 하나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첫번째 선교사를 인도네시아에 파송했다. 그러자 이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여기저기서 작은 기적들이 잇따랐다. 교인수도 얼마 되지 않는 상가교회에서 해외 선교사를 파송했다는 소문이 나자 여기에 자극을 받은 교회들도 '저렇게 작은 교회도 선교를 하는데 우리라고 못할까'라는 마음으로 선교를 하기 시작한 것. 작은 교회의 선교 결단이 주변 교회들에게 선교 자극제가 된 것이다. 

선교에 열정이 많은 정 목사는 자신과 같이 선교에 뜻을 둔 목회자들과 깊은 교제를 하면서 '기독교세계선교회'를 조직하고 동남아선교를 해왔다. 넉넉하지 않지만 기도와 열정으로 선교를 진행하면서 정 목사는 선교지에 갈 때마다 받는 은혜가 너무 크다고 고백한다. 

정 목사는 "유학을 준비하다가 갑작스러운 하나님의 음성으로 교회를 개척할 때도 '한민족은 세계선교를 하는 나라가 될 것이니 네가 선교하는 교회를 세워 그 길을 예비하라'는 말씀을 들었다". 교회를 개척한 후에 세례교인이 100명이 되면 선교사 한 명을 파송해 한국교회가 본받을 수 있도록 세계선교의 모델이 되는 교회를 개척하라는 말씀이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다"며 "앞으로도 힘이 닿는데까지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일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선교열정을 고백했다.

▲ 미얀마 난민들을 위한 교회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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