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처럼 살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종

바보처럼 살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종

[ 기고 ] - 사랑하는 친구 장달윤 목사를 생각하며

이천우 목사
2017년 02월 14일(화) 14:17

장달윤 목사가 하늘나라로 갔다. 지난해 12월 어느 날 장 목사로부터 "이 목사 내 몸이 안 좋아"란 말을 전화로 들었으나 항상 안 좋은 몸이거니 하고 예사롭게 들었는데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마음에 걸리는지 모르겠다.

장 목사는 죽음을 예측하고 내게도 전화를 걸었었고 오창학 목사에게도 전화를 걸어 오 목사네 집에 가보고 싶다고 했고, 김화자 목사님이 살고 있는 안식관에도 그냥 다녀갔다고 했다. 작년엔 산골에 사는 내 집에 오고 싶다고 해서 하룻밤을 묶고 갔는데,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도 그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모르겠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장 목사는 종종 전화를 걸어 "이 목사 누구누구 전화번호 가르쳐 줘"하곤 했다. 자기 은퇴식 때는 나에게 설교를 부탁하기에 "수고 많이 했으니 이젠 편히 쉬어라. 열심히 일하고 쉬는 것은 축복이다. 고생 많이 했으니 주님께서 기뻐하실거다"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고향(포항)에 갈 때 현동을 지나 죽장으로 가는 길이 있으나 길안 굴과 노귀제를 넘어 삼창동 장 목사 목회 상담원에 들리곤 했다. 1200평 땅위에 20평짜리 주택 8채를 지어 은퇴 목사님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연건평 200평 넘는 상담원 건물엔 지방 목회자들을 모아 자기가 강사가 되어 목회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언제인가 나에게 목회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고 해서 내가 개척한 교회에서 민주화 운동하다가 교회가 깨어진 이야기를 했다.

내가 세운 장로 집사 권사가 "목사님 정치설교 하지 말고 순수한 복음만 전해 주세요. 다른 목사님들은 안하는 대모를 왜 합니까"라고 하면 나는 다시는 정치 설교 안 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동지들이 체포, 구속, 해고, 죽임을 당하는걸 보면서 가슴 속에서 타 오르는 불길을 참을 수 없어서 정의를 설교했고 군사반란과 헌정질서 유린을 비판하는 설교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독재타도의 가열 찬 투쟁에 가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세운 장로, 집사, 권사들이 떼거리로 이웃 교회로 갔을 때 나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거리를 쏘다니며 하늘을 보고 울었고 땅을 보고 울었다.

정인영 목사와 장 목사가 세상을 떠나서 요즘 나는 기도하면서 잘 운다. 동갑내기 정 목사는 전화를 걸면 "동생 잘 있나" 했는데 정 목사도 지난해에 세상을 떠났다. 장달윤 목사는 내가 25세 때 대구신학(영남신학대학전신)에서 만났다. 어느 날 채플 시간에 장달윤이라는 학생이 설교를 했는데 얼마나 설교를 잘하는지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대구신학을 졸업하고 계명대 2학년에 편입학해서 졸업을 하고 장 목사는 장신대로 가고 나는 군에 입대를 했다. 제대를 하고 장신대에서 시험을 치던 날 군에서 같이 근무했던 오창학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오창학 목사는 공병 장교로 나는 특수부대 사병으로 근무하면서 주일에 원통교회에서 찬양대와 교회학교를 봉사했었다. 그 후 오 목사와 장 목사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장달윤 목사도 휴학을 했다가 다시 만나 3년을 같이 공부하고 졸업 후 장 목사는 신학생 때 봉사하던 무궁교회를 38년을 섬기다가 은퇴를 했다. 그는 교회를 떠나면서 퇴직금 전액과 교회가 준 사택을 교회에 바쳤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남은 육신도 경희대학교에 기증하고 하늘나라로 갔다.

장달윤 목사, 그는 바보처럼 살았으나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는 어리벙했으나 무궁교회 한 교회를 일평생 섬겼다. 그는 평생을 병과 씨름했으나 수십권의 저서를 남겼고 한없이 허약했으나 80년을 살면서 후배들에게 목회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지극히 소박하게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움을 주고 갔다. 사랑하는 내 친구 장달윤 목사야 보고 싶다.

 

이천우 목사/안동 동안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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