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교는 계속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계속 되어야 합니다"

[ 기획 ] 42년간 전세계 선교사들을 섬겨온 방파선교회 김영곤 사무총장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7년 01월 24일(화) 11:00
   
 

에베레스트 같은 대규모 장거리 등반이나 탐험을 하는 경우에는 물자를 비축하고, 연락 시설을 갖추며, 대원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베이스캠프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선교 또한 고산(高山)의 등반과 같이 힘들고 때로는 위험한 사역이기에 베이스 캠프의 역할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스포트라이트는 정상을 정복하는 이들이 받지만 이를 위해 뒤에서 지원한 이들의 도움 없이 고산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난 42년간 방파선교회를 섬겨온 김영곤 목사의 역할은 선교사들의 베이스 캠프가 되어 주는 것이었다. 김 목사는 지난 42년간 방파선교회의 전 역사 속에서 스스로 조연을 자처하며, 복음의 최전선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을 지원하고, 관리하며,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우리 아빠는 새벽기도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그때부터 전국교회에 후원을 요청하는 전화를 돌리곤 했다"는 그의 막내 딸 고백처럼 그는 영적 전쟁터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실탄과 물자를 제공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왔다. 김 목사는 "방파선교회를 위해 24시간 뇌가 쉬는 적이 없이 살아왔다"며 "정말 선교회만 생각하며 살아온 삶이었다"고 고백한다.
 
현재 전 세계 26개국에 40여 가정을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는 방파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400개의 교회를 세워 헌당했으며, 소속 교회 공동체에서 4만 여명 이상의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신학교, 간호학교, 등 36개의 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4천여 명이 공부하고, 450여 명의 교직원들이 일하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결실을 맺고 있다. 그밖에 장학사업, 사회복지사업, 구제사업, 의료사업 등도 전개하고 있다. 볼리비아의 경우는 선교사 주도로 축구단이 창설되어 그 나라의 리그에서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다. 또한, 해외에서 선교대회를 열면 그 나라의 대통령 및 고관들이 참석할 정도로 선교지에서의 영향력과 공헌도를 인정받고 있다. 그동안 방파선교회를 통해 전달된 선교후원금은 260억에 육박할 정도다.
 
이렇게 풍성한 결실을 맺고 있는 방파선교회의 시작도 초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방파선교회는 1975년 지상에서 가장 가난한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에 정성균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조직한 선교단체다. 장신대 67기인 정 선교사가 방글라데시로 선교를 나가자 동기들 몇 명이 모여 자신의 월급에서 십일조를 떼고, 후원금을 모으면서 시작된 것이 그 전신이다.
 
정 선교사의 동기들은 자체의 힘으로만 후원회를 조직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판단 하에 제1대 회장으로 김종대 목사를 추대해 1975년에서 1987년까지 12년간 선교회의 기틀을 잡아나갔다. 김영곤 목사는 처음에는 서기의 직책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총무를 맡아 지금까지 그 직책을 감당해오고 있는 그야말로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05년 바누아투에서 열린 서교대회 중 선교센터 기공식에 참석한 모습.


실무자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김영곤 목사의 최고의 장점은 펀드레이징의 대가라는 점이다. 김 목사는 이에 대해 "선교회의 살림을 하면서 가장 큰 애로점은 뭐니뭐니해도 모금을 해야 한다는 점"이라며 "우리가 법인이 아니라 임의단체여서 모금을 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회장님들이 헌신적으로 수고해주셔서 기틀을 잡을 수 있었다"며 "지금까지 500여 교회가 협조를 해주었고, 선교를 위해 해외에서, 또한 개인들, 심지어는 타교단 교회에서도 협력을 해주어 지금의 방파선교회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모두가 그를 펀드레이징의 대가로 부르기는 했지만 사실은 변화하는 국내외의 상황 속에서 수없이 번민하고 이를 기도로 이겨내는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김 목사는 "나와 동시대의 목사들이 대부분 은퇴를 했고, 이전에 관계를 맺어놓았던 교회에 새로운 목사들이 부임하면서 연결고리가 끊어지기도 하는데 이럴 때면 참 마음이 아프다"라며 "한국교회가 침체되면서 선교에 대한 관심도 식어가고, 더군다나 선교사들의 자질 문제가 수차례 불거지면서 선교 동력을 모으는데 많은 애로를 겪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낸 비결에 대해 김 목사는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희생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희생을 강요하면 소위 '말빨'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 김 목사의 소신이다. 그래서 그는 선교회 내에서 가장 열심히 선교후원금을 내는 회원 중 하나로 꼽힌다. 그 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가장 적극적으로 선교 후원에 참여하는 회원들이다.
 
"우리 가족들은 지금까지 함께 선교회 일을 해왔어요. 당시에는 컴퓨터도 없어서 모두 손으로 작업을 해야 했는데 우리 아이들은 전국에 띄우는 우편 작업을 밤을 새가며 함께 하곤 했어요. 한번 우편을 보낼 때 최소한 500통은 됐었거든. 지금까지 방파선교회는 4권의 책을 만들어 발행했는데 이 책을 만들 때도 열심으로 도왔어요. 가족들이 너무 고맙고 자랑스러워요."
 
자녀들이 자라는 동안 너무 가난해 유치원, 학원은 물론, 과외 한번을 시키지 못했고,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기는 커녕 가족들이 모두 동원되어 선교회의 잡일들을 해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 의사, 교수, 사업가 등으로 잘 성장해준 자녀들이 너무도 자랑스러운 아버지 김영곤 목사의 마음이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선교회 일을 해왔던 김 목사의 자녀들은 지금도 1년에 700~800만원, 많게는 1000만원씩 선교비를 낸다고 한다. 또한, 김 목사 가족 이름으로 해외에 세운 교회가 4곳이나 된다.
 
"모든 사람들은 내가 부유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쌓아놓고 사는 스타일이 아니예요. 다 퍼주죠. 사심 없이 하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어요. 내 자녀에게는 장학금을 주지 않았지만 82명에게 장학금을 주었어요. 우리 아이들 등록금은 다 대출받아서 충당했어요. 우리 집사람이 암투병 5~6년을 하다가 세상 떠난 지가 8년인데도 우리 방파선교회에서 병원치료비를 한번도 갖다 쓴 적이 없어요. 저뿐 아니라 가족들이 희생했습니다."
 

김영곤 목사는 42년간 선교를 위해 열정을 쏟은 방파선교회의 사무총장 직을 오는 2월 2일 방파선교회 제42회 총회에서 내려놓게 된다. 고령으로 인해 최근 건강이 안좋아지고,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새롭게 인연을 맺은 새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선교회 전체를 생각해 내린 결단이었다.
 
"선교는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교회의 꽃은 선교예요. 꽃이 시들면 모양도 없고 냄새도 없어져요. 선교는 교회의 최우선 과제입니다. 결단코 중단해서는 안되는 사역이지요. 저는 평생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이들을 내가 도와야 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이제 방파선교회의 공식 실무는 내려놓지만 하나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선교를 멈출 수는 없죠. 뒤에서 기도하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나름대로 도울거예요."
 
선교사들이 마음껏 선교할 수 있도록 지난 42년간 방파선교회의 전 역사 속에서 베이스 캠프의 역할을 해준 김영곤 목사의 헌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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