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기획-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성탄기획-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 기획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7년 01월 03일(화) 15:25

"모든 인간의 생명이 똑같이 소중해"

강성열 교수
호남신학대학교

많은 사람들이 이번 국정농단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이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끊고 정의롭고 건강한 국가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갈망하고 있는 바, 이처럼 중요한 시점에 우리는 지금 대림절을 보냈으며, 성탄절을 눈앞에 두고 있다.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이번 사태는 성탄절과 종교개혁 50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우리나라가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로 바로 서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되새겨보는 일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했으며,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어 사역을 감당하셨다. 그가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롭고 공평한 사랑과 약자 보호의 정신을 핵심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 단적인 증거로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 한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 1~2절을 낭독하면서, 자신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그리고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려고 세상에 오셨음을 분명히 밝히셨다(눅 4:17~19). 

그가 공생애 기간 동안 내내 강조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모습을 가진 하나님 나라 복음이었다. 그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 곧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눅 7:22)"는 말씀이나, 최후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에서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 25:40)"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하나님 나라 복음이 어떠한 성격을 갖는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고 병든 자, 갇힌 자 등과 동일시 하셨으며(마 25:31~46),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항상 세리들과 죄인들, 창기들, 차별당하는 여성들과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온갖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차별 없이 치료해 주셨다. 참으로 그에게는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에 따른 차별 또는 남녀 성별에 의한 차별, 장애의 유무에 따른 차별 등이 전혀 없었다. 그의 이러한 사랑과 정의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는 대속의 능력이면서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현장에서 죄악과 죽음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뜻하기도 하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완성됐다. 그가 부활을 통해 이루신 구속 사역은 모든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소중한 것임을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의 초대교회에서 발견되는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는 이처럼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이루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이 세상에 재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당시의 성도들은 모든 물품을 공동으로 소유했으며,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었다(행 2:44~45). 그들은 또한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누구 하나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는 법이 없었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했다. 그 까닭에 그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사도들은 그것을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행 4:32~37). 

바울사도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성도의 거룩한 삶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특히 그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들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되,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롬 12:1~2)"할 것을 권면한다. 또한 그는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할 것이요,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할 것을 강조한다(롬 12:9~16).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더 요긴하고, 한 지체의 고통이 모든 지체의 고통으로 연결된다는 가르침(고전 12:12~27)도 같은 맥락에 속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하나님이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심으로써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심으로써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까지 말한다(고전 1:27~28). 하나님이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 없는 경건을 일컬어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야고보서 1장 27절의 가르침도 같은 맥락에 속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하나님의 정의가 살아있고 고통과 슬픔과 눈물 등이 없는 메시야 왕국에 대한 사도 요한의 가르침(계 21:1~4)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예고된다. 

요컨대, 2016년 성탄절에 오늘의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인간에게 있는 보편적인 소유욕을 포기하고서 자신이 가진 것을 많이 가지지 못한 자들과 함께 나누는 섬김의 정신을 실천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서로 돕고 의지하는 정의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데 앞장서야 한다. 재물은 때때로 그것을 소유한 자에게 풍요의 종교를 추구하게 하며 우상 숭배에 버금가는 탐심의 죄를 범하게 하는 까닭에(엡 5:5, 골 3:5), 이기심과 탐심을 물리치고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세계 통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과 윤리의 차원을 넘어서서 신앙적인 삶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하여 살고자 하는 정의로운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궁극적으로는 정의로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지향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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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어"

백광훈 목사
문화선교연구원장

대통령 탄핵소추라는 한국 정치사의 격랑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사인(私人) 최순실이 공정해야 할 국정을 농단했고 대통령은 공평무사해야 할 직무를 유기한 채 권력을 남용했다. 이 터무니없는 스캔들의 민낯들이 드러나면서 남녀노소,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시민들은 광장으로 몰려나왔고, 힘을 남용한 이에게 그리고 그 힘을 등에 업고 반칙을 일삼아 기회를 독점하고 부를 쌓은 사람들에 분노하며, 공평과 정의의 회복을 촉구하는 촛불을 힘차게 들어 올리고 있다. 그 어느 시대보다 한국 사회는 공평과 정의가 바로 서기를 갈망하는 전환기적 시간을 지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대림과 성탄절을 지나며 회개와 기다림, 사랑과 나눔, 희망의 촛불을 밝혀온 지금, 우리는 광장을 밝힌 촛불을 생각하게 된다. 광장의 촛불과 예배당을 밝히는 촛불은 분명 다르고, 그 외침과 기도 소리 또한 전혀 같지 않을진대, 새로운 세상과 구원을 열망하는 마음만은 그리 다르지 않는 것은,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요한 1:5)"는 진리를 마주하며, 세상을 밝히려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이 탄생한 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혹한 시대였다. 소망은 없었고 삶은 고단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외치는 예언자의 외침도 끊어진지 400년이 지났고, 카이사르 로마 황제의 정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듯 보였다. 로마는 유일한 세상이었고 로마의 평화 외엔 그 어떤 평화도 용납되지 않았다. 분봉 왕 헤롯이 정치적 야욕을 위해 두 살 아래의 아기들을 내키는 대로 죽일 수 있었고 백성들은 숨죽여 애통하던 시대였다. 그렇게 시대는 어두웠다. 그러나 어두움을 밝히는 새 빛은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동방의 박사들은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을 갖고 별빛을 따라 수천 킬로미터를 가로질러 메시아를 영접했다. 밤을 새며 양을 지켜야했던 가난한 목자들은 천사들이 전해준 메시아 탄생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갈 수 있었던 깨어있는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목숨을 걸고 예수의 수태를 기꺼이 받아들인 마리아와 의로운 사람 요셉은 임마누엘, 예수 탄생을 기다리며 한 밤중에 믿음의 촛불을 들어 말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밝혔다.  

그들이 맞이한 메시아는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여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셨다, 눈이 먼 자를 다시 보게 하셨으며,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다(눅 4:18~19). 주님은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셨다. 불의한 이들에 의해 세상 주변부로 밀려나있던 이들을 중심의 자리에 다시 세워주시고, 죄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 말씀하셨다. 그분의 정의는 무조건적인 평등도, 부자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주는 폭력적 정의도, 기계적 정의도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열심히 일한 이들에게만 아니라, 일이 거의 끝이 날 무렵 뒤늦게 일할 수밖에 없는 자에게도 후하게 품삯을 쳐주시는(마 20:1~16) 은혜를 더한 정의였으며 생명을 살리는 정의였다. 주님은 가난한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 말씀하시며, 우리 곁에 있는 길가의 사람들, 그 강도만난 연약한 이들을 살피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연대의 의무가 우리에게 있음도 일려주셨다. 무엇보다 그 분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정의란 사랑과 희생을 통해 성취되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정의와 공의의 새 물결은 멈추지 아니하고 세상으로 흘러들어 생명의 역사를 이뤄갔다. 노예무역을 철폐시킨 윌버포스, 흑인을 해방시키고 인권을 증진시킨 링컨과 마틴 루터 킹, 생명을 걸고 불의한 나치정권에 저항한 본회퍼,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다 죽임당한 오스카 로메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종식시킨 넬슨 만델라 등, 역사의 전환기마다 하나님의 정의를 갈망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롭지 못한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비관주의를 넘어서 자기희생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흘러가도록 역사의 물꼬를 터왔다. 

공평과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인의 역사적 응답들은 21세기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책임 있는 삶의 자리를 모색하게 한다. 무엇보다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게 요청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움에 대한 거룩한 비전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사사화된(privatized) 신앙을 넘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의 정의로운 번영과 선의 증진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공의와 정의의 비전 속엔 물질의 축복만이 하나님의 복이라 말하는 성공주의 신앙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공동체에 대한 관심 없이 교회 안으로만 퇴각하려는 게토화된 신앙도, 정치적 힘과 권력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유혹도 설 곳이 없다. 또한 이 비전은 급격한 세속주의의 물결 속에서 돈을 하나님처럼 떠받들고 개인의 만족과 행복을 삶의 최고 가치로 삼아왔던 우리 자신에 대한 철저한 회개를 동반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날로 심각해지는 양극화의 간극과, 지연과 학연, 혈연이라는 비겁한 논리의 울타리를 방관하고, '금수저, 흙수저'란 자조어린 이분법이 횡횡하고, 생명을 키워내는 것을 포기해버린 슬픈 공동체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던 우리 안의 냉소주의와 무관심을 몰아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무거운 마음으로 대림 성탄절은 보내는 2016년의 끝자락이다. 시대의 어두움 속에서 정의를 목말라하는 이 땅의 한 겨울을 지나며, 평화의 왕이요, 의의 주로 오신 아기 예수를 우리들만의 예수가 아니라, 이 땅 모든 이들의 희망이요 힘과 위로의 주로 맞이하도록 그 오실 길을 예비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온 땅의 축복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이 흘려보내신 정의와 공의의 물길이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도록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기도와 작은 실천들이 오늘 이 땅에서 다시 시작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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