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칼 슈타트/개혁교회의 선구자

<45>칼 슈타트/개혁교회의 선구자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김인주 목사
2016년 12월 14일(수) 09:52

안드레아스 루돌프 보덴슈타인(1486-1541)은 마인강변의 도시 칼슈타트에서 태어났다. 출신 지역을 따라서 그의 이름 대신 칼슈타트로 통한다.

일찍이 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비텐베르크 신학부의 교수가 되었다. 1512년에 루터가 박사학위를 취득하던 때에, 그는 학장이었고, 학위과정의 마지막 절차인 논쟁을 주관하였다.

개혁운동 초기에 그는 루터보다 훨씬 주목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라이프찌히 논쟁은 본래 그가 주역이었지만 루터가 오히려 두각을 나타내었다. 1521년에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무르면서 비텐베르크로 돌아오지 못하던 시기에, 멜랑히톤과 더불어 그는 개혁의 선봉에 나섰다.

성탄절에는 종래의 관습을 벗어나 빵과 더불어 평신도에게 잔을 허용하는 성찬을 베풀었다. 처음으로 실시된 개신교 예배였다.

사제의 복식도 거부한 그의 예배인도는 매우 파격적인 시도로 보였다. 결혼을 선언한 그의 행보도 특기할 사항이었다. 성상을 철거하고, 구제를 위한 공동모금을 실시하는 등 그의 주장은 과격한 면이 있었다.

루터가 귀환하면서 비텐베르크는 속도를 늦추는 점진적인 개혁으로 선회하였고, 칼슈타트는 배제되었다. 개혁의 중심도시를 떠났고 인근 지역에서 개혁을 시도하지만 큰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이미 노선이 다르다고 판단한 루터는 끈질기게 그의 활동을 제한하려고 애썼다.

결국 그는 스위스로 향하였고, 바젤에 정착하여, 구약학 교수로서 봉직하였다. 루터가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전체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는데 칼슈타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오해한 면이 있다.

신학의 결이 다르다고 판단하여 한 통속이라 단정하였다. 성찬과 성상에 관한 주장이 스위스 그리고 칼빈의 성향과 어울리는 면이 많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1541년 12월 24일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

<봉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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