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카스파 쿠르치거

40/ 카스파 쿠르치거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김인주 목사
2016년 11월 09일(수) 10:30

카스파 크루치거(1504-1548)는 라이프찌히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보헤미아인이었고, 얀 후스의 신앙전통에 서 있었다.

라이프찌히에서 루터와 엑크 사이에 토론이 벌어지던 때에 그의 가족은 비텐베르크로 이주하였다. 자연스럽게 종교개혁의 중심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일찍이 종교개혁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1533년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교수진에 늘 이름이 오르곤 했다. 매우 촉망받는 제2세대 종교개혁 이론가로서, 루터는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자연과학에도 좋은 관심과 재능을 보여주었다.

1529년 마르부르크의 성만찬 토론과 이후 모든 종교대화의 자리에 참여하였다. 하게나우, 보름스, 레겐스부르크로 이어지는 신구교간의 협상에서 그는 개신교 측의 간사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루터의 저서를 출간하는 일에도 그는 크게 기여하였다. 설교집을 편찬하였고, 성서번역에는 중요한 동료로서 몫을 감당하였다.

루터의 강의와 강연들을 속기로 적어 보존하였고 루터의 첫 문집을 편집하는 책임을 졌는데 무리 없이 출판되었다. 폭넓은 인문학적 소양들로 인하여 루터보다는 멜랑히톤과 더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때문에 논쟁이 벌어지고 루터와 소통이 어려웠던 때도 있었다. 특히 선행 혹은 공로에 대한 이해에서 그는 멜랑히톤 편을 들었고 루터, 부겐하겐과는 다른 색채의 신학을 전개했다.

슈말칼덴 전쟁에서 패하고 한시법이 제정되던 시기 1548년에 그는 사망하였다. 11월 16일이었다. 오래 살았더라면 큰 역할을 해냈을 신학자였다. 

한편으로는 더 이상 분란의 중심에 설 기회가 없었기에 루터 정통파를 자처하던 학자들이 크루치거를 잘못 나간 학자로 공격하는 일도 없게 되었다.
<봉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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