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가가는 선교

삶으로 다가가는 선교

[ 땅끝에서온편지 ] <2>

차훈 목사
2016년 08월 23일(화) 15:22

친구, 잘 지내셨나?
 
요즘 한국에 더위가 한창이라고 하며 섭씨 35, 6도에 밖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주의할 사항들을 보도하는 것을 보면 괜시리 웃음이 나는 걸 난들 어쩌겠나? '남의 고통이 나의 행복'이런 것은 아니네. 여기는 그런 기온은 상온이라 할 수 있고 더울 때는 섭씨 40도를 훌쩍 넘기는데. 이젠 내 몸이 열대 지방에 코드가 맞추어진 것 같으이. 같은 환경조건에서도 감각과 반응이 많이 차이가 나네 그려.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내가 좀 다른 감각과 시각에서 이야기를 해도 너무 뭐라고 하지 말게나. 내가 한국 감각을 좀 잃은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네.
 
웃자고 하는 소리지만 필리핀은 두 가지 계절이 있는데, '더운 계절'과 '더 더운 계절'이네. 사람들이 모두 체감온도로 타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이기적인 인지상정일테니. 오늘은 나도 나대로 비현실적인, 내 아내의 말대로라면 아직도 철들지 못한 이야기를 주절거려 보려고 하네.
 
언젠가 지인으로부터 사진 한 장을 받았네. 사진에는 개울에서 아이들과 멱 감으며 웃고 있는 옛 친구의 모습이 있었는데 내가 중국 북경을 떠나 이 곳 필리핀으로 온 이후 오랫 동안 소식이 끊기어 궁금했던 친구 선교사였다네. 그리고 그 친구가 지금 중국 계림 어디인가 시골구석으로 내려가 살고 있다는 전언이었네.
 
선교사로서 전략적으로 꽤나 중요하다 할 수 있는 북경대 교수 자리를 내팽개치고 버림받은 장애아 한족 어린아이들 몇 명을 데리고 아마도 그 아이들에게 최적의 환경인 시골 마을로 내려가 육십 나이에 발가벗고 개울에서 애들이랑 멱 감으며 살아가는 친구가 오늘 차라리 그리운 것은 왜일까?
 
그런 선교사를 이해하고 묵묵히 후원하는 교회도, 선교사도 모두 존경스러웠네. 특히 사모님이 더. 사모님 주변에 하나님 이야기 듣겠다고 몰려들던 까까머리 아이들이 떠오르네.
 
그 선교사들을 그때부터 아이들은 아빠 엄마라고 부르고 있었고, 교회라는 말은 안하지만 원시 기독교 가족 공동체를 통해 아이들은 매일 매일 하나님 임재 아래 생명을 이어가는 뼛속 깊은 예수쟁이로 커가고 있을 것이 눈에 선하네. 그리고 지켜보고 있을 주변 동네 사람들은 암암리에 저들이 믿고 있는 예수, 하나님이 존경스러워질 것이 틀림없을테고.
 
오래 전부터 나에게는 큰 숙제가 있었다네.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일까? 오늘의 이런 모습의 교회와 교단이 정말 주님이 원하셨던 바로 그 모습이었을까? 지 교회와 교단을 넘어서는 선교를 할 수는 없을까? 한국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와 교단을 이식(移植)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그건 아니라고 하겠지만, 기실 아직도 우리는 교회와 교단을 넘어 '하나님 나라 선교'에 미치지는 못하고 있지 않은가? 종교를 넘어서는 선교는 불가능한 것일까? 기독교는 종교이기 보다는 관계이고 삶의 방식일진대….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의식으로, 가치로, 세계관으로 삼고 사는 삶을 이웃들과 나누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저들을 보듬고 섬기며 더불어 사는 그것이 진정한 선교가 아닐까? 본질은 형식의 옷이 필요하겠지. 그러나 형식은 본질을 제대로 잘 표현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만 하는 데 오늘 우리는 AD313년 이후 잘못된 남의 옷을 걸쳐 입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종교의 굴레를 벗고, 십자가의 주님처럼 차라리 벌거벗은 기독교로 저 낮은 곳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가 또 하나의 종교로 저들에게 다가가는 한 문화충돌과 종교전쟁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본질을 실천하는 삶으로 다가간다면, 인간 본연의 목마른 모든 이들의 가슴이 열릴 것이다.
 
종교가 아닌 삶으로 다가가는 선교를 살아가는 그 친구가 부럽고 그립다. 벌거벗은 십자가 주님처럼, 벌거벗고 아이들과 멱 감는 그 친구를 그려본다. 나의 이 숙제는 언제 끝낼 수 있을까? 샬롬.

차훈 목사
총회 파송 필리핀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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