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뉘른베르크 임시 협정

26/ 뉘른베르크 임시 협정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김인주 목사
2016년 07월 19일(화) 13:57

1532년 7월 23일 뉘른베르크에서 임시협정(Anstand)이 체결되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5세와 슈말칼덴 동맹 사이에 체결되어 당분간 긴장을 풀고 공존하자는 협약이 이루어졌다.

개혁의 내용 중에서 교역자들의 결혼과 성찬에서 잔을 나눠주는 것, 두 가지는 허락한다는 것이다. 개혁의 내용을 더 진전시켜서도 안 되고 개혁세력이 지역적으로도 확산되는 것도 불허한다고 못 박았다. 대신, 일 년 반 동안은 슈말칼덴 진영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1531년 초에 슈말칼덴 동맹이 결성된 이후, 처음으로 눈에 띄는 성과를 올렸다고 할 수 있다. 1530년에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신조를 제출하였지만, 황제는 인정하지 않고 무력진압의 조짐을 보이며 위협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개신교 진영은 군사동맹으로 대항하였다. 두 주축 세력인 작센과 헷센의 중간 지점의 도시 슈말칼덴에서 모였기에 그 이름으로 불리웠다.

황제의 반대편에 선 세력이 다 몰려와서 회원이 되기를 원하였다. 천주교신앙의 프랑스도 이슬람의 터어키도 군사동맹으로 칼5세를 압박하는 작전에는 찬성하는 터였다. 이들은 기웃거리다가 한 몫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고서는 생각을 접었다.

1539년에 다시 양측은 전쟁을 자제하자고 하면서, 프랑크푸르트에서 협정을 맺고, 임시법을 6개월 연장하였다. 공의회를 모여서 적절한 결론을 내리기까지 기다리자는 것인데 시한 없이 계속 연장되었다. 공의회도 신학자들의 협의회도 답을 도출하지 못하자 남은 방법은 전쟁이었다.

슈말칼덴 전쟁에서 완승을 거둔 황제는 아우그스부르크 한시법(Interim)을 통하여 개신교진영을 압박하였다. 그 내용은 임시법과 마찬가지였다. 완강하게 밀어붙이는 황제에 대항하여, 작은 틈새를 확보하고 뿌리를 내린 것이 루터교회였다. 

 

<봉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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