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모리츠

24/ 모리츠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짧게 끝난 선제후의 꿈

김인주 목사
2016년 07월 06일(수) 11:20

모리츠(1521~1553)가 전쟁터에서 총상을 입었다. 하노버에서 동쪽으로 25km 지점인 지버스하우젠에서 일어난 일이다. 며칠 버티지 못하고 7월 11일에 사망하였다. 종교개혁시대의 풍운아요 큰 야망을 드러냈던 젊은 영주로서는 허망한 종말을 맞이한 셈이다.

그는 작센의 공작 게오르그의 조카로 태어났다. 게오르그는 루터에 맞서서 완강하게 종교개혁을 방어하였고 조카 모리츠도 천주교 신앙을 따르기를 원하였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게오르그가 사망하자 아우인 하인리히가 영주가 되었다. 2년 뒤에 하인리히가 별세하였고, 모리츠는 약관의 나이로 작센의 공작이 되었다.

모리츠의 스승은 마인츠의 알브레히트였는데, 면죄부 발행으로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던 장본인이다. 게오르그도 성심을 다하여 조카를 가르쳤으나 대세를 거스르지는 못했다. 하인리히가 1536년 개신교 신앙을 택하면서 공작령은 더 이상 천주교 진영에 남아있는 것을 거부하는 길을 가게 된다. 

1541년에 육촌 형에 해당되는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와 같이 보낼 기회가 생겼지만 둘은 서로 잘 어울리지 못했다. 대신 헤센의 필립이 뜻이 통하는 동지가 되었다. 필립의 딸 아그네스가 모리츠의 눈에 들어오면서, 마르부르크에서 새로운 가정이 탄생하였다.

적지 않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필립은 모리츠를 친구로 대하였다. 법적, 신앙적으로 문제가 되어버린 이중결혼의 어려움도 솔직히 털어놓았다. 슈말칼덴 전쟁에서 모리츠는 선제후가 되는 조건으로 황제를 편들었다.

선제후의 꿈은 이루었지만 배신을 거듭하며 이득을 챙겼다. 단명했다는 아쉬움 때문에 비난은 덜 받았다. 재위 중에 창설된 궁정악단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관현악단으로 꼽히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가 되었다. 
<봉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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