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이 주는 교훈

바벨탑이 주는 교훈

[ 기고 ]

김재양 장로
2016년 06월 30일(목) 09:59

노아의 아들 함의 손자인 용사(勇士) 니므롯이 동방으로 이동하다가 시날 평지에 성읍과 탑을 세워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고자 하기에 하나님이 보시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흩어버렸다(창 11:1-9).

바벨의 뜻은 "신의 문 또는 혼란케 하다"인데, 니므롯이 바벨 성읍에 '하나님의 문'에 닿을 탑을 쌓아 하나님과 대적 하려하기에 사전에 하나님이 언어를 '혼란케 하여' 그 일을 중단시킨 것으로 보면 '신의 문'과 '혼란케 하다'라는 그 뜻을 한꺼번에 포함하고 있다는 풀이가 정설인 듯하다.

어떻든 '바벨'은 성경에서는 확실하게 정의되지 않았지만 '바벨론'이란 대제국의 전신인 '바벨성읍'보다는 '바벨탑'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원조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바벨탑'이라고 하면 우선 '무너지는 것'의 대명사로 알고 있는 이유이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믿는다. 그러나 대가없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받은, 쌓이고 쌓인 은혜가 타성적으로 바뀌어져서 교만의 싹인 자만심으로 도취되기 일쑤다. "나니까 할 수 있지 다른 사람은 아마 할 수 없을 거야"라는 마음이 삶 전체를 삼켜버린다.

필자도 여섯 살 때까지 6대 독자로 금지옥엽 귀하게 자라서인지 식구들로부터 고집불통으로 취급 받아 자식들 3남매에게 그 흔한 아빠란 소릴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살았어도 그 이유를 모르고 살아왔다.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정착했으면 기근이 와도 믿고 살지 못하고, 여호와의 지시도 없이 제 멋대로 애굽으로 이주했다가 아내 사래까지 빼앗긴 사건을 익히 알고도 인간들은 어쩔 수 없이 교만이란 늪에서 허우적대기 마련이다.

교만이 바벨탑을 세우고, 무너진 바벨탑이 생기를 불러오고, 이 싱그럽고 힘찬 생기가 영생하는 소망을 품게 하고 이 소망이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은혜의 체험에 타성이 붙어 교만으로 바벨탑으로 개미 쳇 바퀴 도는 삶을 살아가는 게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이라면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편에 손을 들어 주고 싶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성령님을 보혜사로, 즉 삼위일체이신 여호와를 믿는 사람이라면 삶 전체가 하나님 우선으로, 말씀에 순종하고, 영광의 도구로 예배자로 살아야함에도 불구하고 마귀에게 쪽을 쓰지 못하고, 또 그렇게 안간힘을 다해서 살아보아도 지나고 나면 후회막급뿐인 게 인간이다.

어느 성경역사학자가 "바벨탑은 8층까지 건축되었는데 1층은 길이와 넓이가 각각 600 척이나 되었고, 8층은 정금으로 만든 '벨'이라는 높이 40척이나 되는 높은 신상이 있는 피라미드형"이라 추측해서 설명한 것을 읽었는데, 바벨탑이 이렇게도 엄청나게 평가된 것은 인간의 교만, 즉 교만의 산물인 욕심과 시기 질투하는 본성이 한량없이 크기에 그렇게 묘사되지 않았을까?

아마 완전한 성자 수준의 신자거나 아니면 교회마당만 밟고 출입만하는 사이비 교인이 아니라면 교만의 회오리에서 자유스럽지는 못하다는 차원에서 바벨탑을 묘사했음이 분명하다.

어떻든 택한 백성이니 믿기만 하면 구원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구원파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열려져 있는 구원의 길은 연속적인 회개의 삶과 바벨탑을 허물어 꼬리를 물고 마음 판에 도사릴 교만을 도려내는 삶이 없으면 소망을 이룰 수 없다는 진리를 터득하는 게 상책이다.

바벨탑을 세우려고 작정하고, 높이와 넓이와 장식을 광대하고 화려하게 짓는 것도 다 인간들이 욕심들을 채우기 위해서이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광 돌려 드리기 위함은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바벨탑이라면 높고 화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비결과 척도는 바로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 이웃은 외면하고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보내자는 바벨탑은 결단코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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