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존 직분자와 기도생활

항존 직분자와 기도생활

[ 기고 ]

이봉호 목사
2016년 06월 07일(화) 15:31

보편적으로 장로교단에서 '목사, 장로, 집사(안수집사), 권사'이 분들을 통칭하여 항존 직분자라고 부르게 된다.

그중에 목사의 소속은 노회 소속이며, 그 외 직분자들은 교회 소속으로서 교단 헌법에 따라 신앙과 행위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실한 자들을 선별하여 노회와 교회로부터 안수와 혹은 취임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목회자로 부름 받고 성직을 수행하는 목회자를 위시하여 교회에서 교인의 본이 되고 교회 리더와 일꾼으로 부름 받아 쓰임을 받고자 하는 항존 직분자들은 신앙 안에서 깊게 생각해 보면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딤전 1:12)는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그런 은혜를 입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본인 역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라는 그분의 깊고 넓은 사랑 안에서 구속의 은혜를 누린 것을 생각하며 양무리를 치거나 혹은 교인의 대표로 뽑아주고, 세워 주신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눈물이 나고 감사할 일이 아닐까?

그런 까닭에 나름 임직을 하는 그 날에는 주님 앞에 '좀 더 잘 섬겨 보리라' 각오와 다짐을 하며 뜨거운 사명의 눈물도 흘리기도 하지 않는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더 한번 결단도 하지 않는가?

사람이라는 인간의 나약성으로 인해 굳은 다짐과 결단과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조금씩 사그라진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신앙의 자세와 틀이 흔들거림 현상이 보이거나 넘어져 간다는 느낌이 올 때는 가차 없이 주님의 성전을 찾고 주님께 더 엎드림을 통해 그분의 구속의 은총과 임직을 받는 그 감격의 그 결단을 다시 회복해야 되지 않을까?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단(습)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8)

하나님을 믿는 모든 크리스찬도 당연시 되거니와 특히 중직을 수행하는 항존 직분 자들이 나의 신앙을 바로 세워 가지 않고 교회와 성도들을 잘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본인들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의 신앙의 틀이 깨어지지 않기 위해 더불어 좀 더 충성과 헌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경건 생활에 중단 없는 연습을 해 가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말씀과 기도 생활이 아닐까?

빠른 물질문명 속에 정신없이 달려가야 하는 인생길이지만 '나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사람', '주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 무슨 일보다 기도와 말씀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본다.
보통, 사명의 사람, 십자가의 길, 충성, 헌신…. 이런 단어와 표현을 쓰면 목회자로 부름 받은 성직자들에게만 해당 된다는 생각을 하기 쉬우나 만인제사장 설에 근거해 보면(벧전 2:9) 모든 하나님의 사람 특히 항존 직분자들도 이 일에 포함 된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차제에 항존 직분자 들로 세움 받은 교회안 중직자 들은 노회와 교회로부터 임직을 받았다면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기도 생활에 쉬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와 시간을 핑계 삼기도 하고, 자신의 처한 상황을 이유로 들기도 하고 또한 불가피하게 교회를 옮겨 와서 협동 장로, 협동 안수집사이기 때문에(교단 법에는 없는 명칭이지만) 그나마 자유롭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법칙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리라.

암튼 신앙의 각도가 틀어진 요즘 항존 직분자들을 보노라면 하나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나 자신부터 부끄럽기 짝이 없다. 바라기는 바울이 아들 같은 디모데를 향해 '너의 처음 안수 받을 때 은사를 불일 듯 하기 위함'(딤후 1:6)이라는 말씀을 다시 되새겨 보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끊임없이 엎드리는 항존 직분자들이 되어야 하리라.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