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유스투스 요나스/루터 최측근, 수행비서로 불려

19) 유스투스 요나스/루터 최측근, 수행비서로 불려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김인주 목사
2016년 05월 31일(화) 15:40

종교개혁자 유스투스 요나스(1493-1555)는 6월 5일 노르드하우젠에서 출생하였다. 법학을 공부하는 동안 루터 이외의 개혁자들과 먼저 친분을 쌓았고 개혁의 의지를 나타내게 되었다. 종교개혁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그는 신학부 교수로 전환하였다. 에라스무스와 교류하면서 크게 칭찬받았는데 그의 노선변경을 막으려고 에라스무스가 애썼지만 통하지 않았다.

좋은 저작을 많이 남기지 못하였으나, 번역에는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루터와 멜랑히톤의 저술을 라틴어는 독일어로, 독일어는 라틴어로 옮기는 역할을 주로 담당하였다. 루터의 '노예의지론', 멜랑히톤의 '신학해제' 등 그의 번역의 솜씨에 힘입어 더 널리 읽혀졌다.

개혁을 촉발한 면죄부 논쟁의 95개조 논제도, 라틴어로 작성된 것을 요나스가 번역하자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많이 읽히게 되었다.  1521년부터 종교개혁의 진원지인 비려베르크 성주교회(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하였다. 1523년부터 10년 동안 신학부의 학장으로 봉직하였다. 단호하게 개혁을 지지하여 비텐베르크의 신앙 혁신에 큰 공을 세웠다. 루터의 최측근으로 보좌하며 수행비서라 불리울 수 있는 위치였다.

루터와는 온 가족이 자주 오가며 자주 어울렸다. 그 집에서 가장 자주 얻어먹은 사람으로 꼽힌다. 부인과 자녀들도 스스럼없이 통하는 사이였다. 두 개혁자의 나이가 10년 정도 차이 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한 질서를 만들어준 것으로 보인다.
비텐베르크의 개혁자 진영에서 중요한 논쟁이나 회담, 문서작성에 늘 한몫을 감당하였다.

루터가 밖으로 나서는 경우 그는 늘 동행하였고, 다른 개혁자 특히 멜랑히톤과 신속히 연락할 수 있도록 애썼다. 루터의 마지막 여행이 되어버린 아이슬레벤으로 가늘 길에도 동행하였고, 결국 임종을 지킨 유일한 동역자가 되었다.


<봉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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