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 현공 프리드리히 선제후

⑮ 현공 프리드리히 선제후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김인주 목사
2016년 05월 03일(화) 14:07

비텐베르크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1463-1525)가 5월 5일 사망하였다. 그는 온화하고 의로운 성품으로, 살아있을 동안 지혜로운 영주라는 별칭을 얻었다.

1486년에 부친을 계승하여 작센 선제후가 되었다. 바로 그 전 해에 작센은 둘로 나뉘었고, 그의 아버지인 에른스트가 선제후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알브레히트는 공작이 되어, 정치적인 영향력은 다소 작지만, 드레스덴과 라이프찌히 등 좋은 몫을 차지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제후로서 학문과 교회의 개혁에 큰 관심을 가졌다. 1502년 비텐베르크 대학을 개교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렇지만 그는 또한 중세의 사고와 신앙을 벗어나지 못했다.

유럽에서 소문난 성물수집가로서 그는 막대한 양의 보화를 소장하였다고 알려졌다. 이를 공개하여 얻는 수입으로 대학을 운영하고자 했을 정도였다. 취약한 재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부분 교수직을 석좌제로 운영하였다.

면죄부 논쟁이 가열되면서, 그는 루터를 적대시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관계를 중간에서 완충의 역할을 감당한 사람은, 동생 요한이나 비서 슈팔라틴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평생에 단 한 번도 직접 대면하여 만난 일이 없었다.

귀빈이 올 때마다 개혁자를 영주교회의 설교단에 세웠는데, 설교자와 회중으로 마주친 것이 전부였다. 선제후가 종교개혁에 얼마나 호의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강하게 막지는 않았기에 후세에 그는 개혁의 주도자 혹은 조력자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

평생 경건하게 독신으로 지냈다고 하지만 그에게도 동거하는 여인이 있었고 아들도 있었다. 고인의 운구행렬에는 아들들이 있었지만 서자로 취급받았다. 선제후 지위는 동생 요한, 그리고 요한의 아들 요한 프리드리히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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