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 목양칼럼 ]

엄대용 목사
2016년 04월 19일(화) 16:40

지금 교회에 부임하게 된 것은 선교사로 가려다가 IMF로 못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항상 선교에 대한 거룩한 부담을 안고 목회를 했고 현재도 그렇다. 선교적인 교회를 만들어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목회를 하고 있다.

부임하고 3년 되던 해 당회수련회를 중국으로 다녀왔다. 이후 청년대학부를 중심으로 단기선교를 중국 등지로 다녀왔다. 교회 사명이 선교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있고 강조하지만 현실적인 여러 문제로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선교 초기에는 중국을 여러번 다녀왔다. 중고등학생들에게도 선교적 도전을 줘야겠다고 생각해 같이 가게 됐다. 선교사도 오지를 잘 다니지 못하지만 우리만 가면 오지를 가기 원해서 새벽에 일어서 한 교회를 방문하고 길게는 9시간 정도 걸려 다른 교회를 방문한 후 저녁 늦게 숙소에 도착했다.

그러다보니 선교적인 도전도 도전이지만 몸이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중국은 사역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방문 후에 사역을 듣고 예배하며 기도하고 찬양하고 지역 명소들을 몇 곳 둘러보는 것이 공식처럼 되었다. 이렇게 몇 번을 하니 다음 해에는 불평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선교지를 방문하는 것만으로 영성이 회복되는 감동이 있었지만 교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매번 선교지를 방문할 때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묵묵히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보며 도전을 받고 목회에 새 힘을 얻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있다. 2011년도 노회장 때 코트디부아르 아비장한인교회를 방문했을 때다. 당시 코트디부아르는 10년 동안 내전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선교사가 간곡히 부탁해서 갔다. 방문하는 해 5월에 10년 동안의 내전이 종식됐지만 8월 말 방문시에도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방문 후 '뻘 속에서 찾은 진주'처럼 귀한 선교지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내전 결과 180여 명의 한인교회가 30명 정도만 남고 다 흩어졌다. 30명의 교인들이 10년의 내전을 겪으면서 연단을 통하여 진정한 성도들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 작은 교인들이 121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2000평의 신학교를 세우고, 서아프리카 15개 지역을 선교하고자하는 열정으로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

당시 임직자 중 장로 두 분을 세웠는데 선교사에게 들은 감동적인 이야기로 지금도 가는 곳마다 간증 한다. 내전이 한창일 때 선교사가 당시 안수집사였던 이분들에게 교회는 내가 지킬 테니 당신들은 아프리카 다른 지역에 좋은 집도 있으니 떠나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분들은 "목사님, 우리도 같이 교회를 지키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이 물 붓듯이 축복해 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분들 모토가 교회를 개척할 때마다 크고 작은 재정이 들어가는데 건축할 재정이 부족하면 선교사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목사님, 부족한 돈은 제가 하겠습니다." 참으로 귀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울 곁에서 선교 현장을 따라다니며 협력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분들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세 번이나 코트디부아르 선교지를 방문하게 됐다.

세 번째는 장신대평의회 서기를 맡고 있을 때였다. 장신대 김명용 총장을 모시고 가나의 신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으러 가면서 총장께 코트디부아르 방문을 적극 추천했다. 김 총장도 이곳을 방문하고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모습에 감동을 많이 받았다. 그 이후 비서의 말을 빌리면 김 총장도 가시는 곳마다 코트디부아르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고 한다.

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요즘 한국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견해들을 많이 쏟아내지만 그래도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다. 예수만이 소망이다. 이 예수를 땅끝까지 전해야 한다. 지금까지 선교는 나의 가슴을 뛰게 하고 선교지를 다녀올 때마다 목회현장에 더욱 활력소를 불어 넣고 힘을 얻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앞으로도 삶이 다하는 날까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교적인 교회, 선교적인 목회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