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페르디난트 1세 프랑크푸르트서 시작된 화해

⑩ 페르디난트 1세 프랑크푸르트서 시작된 화해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김인주 목사
2016년 03월 17일(목) 10:29

155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5세가 황위를 아우에게 물려주고 수도원으로 칩거하였다. 독일에서 시발된 종교개혁의 운동은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해결되지 못했다.

제후들은 세속의 욕망을 드러내고, 노선을 바꾸며 배신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이에 진저리가 난 황제는 은퇴를 선언하였다. 황제의 지위는 페르디난트 1세(1503-1564)가 이어받았다. 1558년에 새 황제는 아헨에서 즉위하였다. 아헨은 샤를마뉴가 프랑크 왕국의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대 도시로서 오늘날에도 양국 뿐아니라 유럽전체의 통합을 상징하고 있다. 즉위식에 이어 3월 18일에는 프랑크루르트에서 연회가 벌어졌다. 뢰머라고 부르는 구 시가지의 중심에 있는 건물에서는 전통적으로 황제 선거와 연회가 열리던 공간이다.

이 기회를 활용하여 개신교 제후들은 개혁진영의 분열을 극복하고 화해를 시도하기로 합의하였다. 슈말칼덴 전쟁에서 패하여 황제와 천주교의 압박은 한층 커졌다. 루터가 사망한 이후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주도권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마티아스 플라키우스를 지지하는 강경파 일리리쿠스파, 필립 멜랑히톤의 노선을 따르는 필립파로 나뉘어, 좀처럼 양보하지 않고 서로 비난하였다.

멜랑히톤은 고대의 세 신조 즉 사도신경,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기본으로 삼자고 하였다. 그리고 아우그스부르크 신조 등 근래의 신앙고백 중에서 일치의 기초로 삼을 수 있다고 제시하였다.

1577년에 일치신조(협화신조)가 작성되기까지 적지 않은 논란이 벌어졌다. 점차 교회의 주도권은 제후들에게 넘어갔고, 그 구조는 일차대전에서 독일의 질서가 무너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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