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루리곤에서 온 개혁자

일루리곤에서 온 개혁자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⑧ 마티아스 플라키우스

김인주 목사
2016년 03월 02일(수) 14:58

마티아스 플라키우스(1520-1575)가 3월 3일 출생하였다. 출생지를 따라 일리리쿠스라 불리웠는데, 신약에도 일루리곤<사진>이라고 나오는 지역은 예전에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이루었던 곳이다.

그는 젊었을 때 비텐베르크에서 공부하였다. 생애 말년의 루터 그리고 멜랑히톤으로부터 촉망받는 신학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가 활약하기 시작한 초창기는, 개혁진영이 심하게 수세에 몰렸던 때였다. 황제와의 전쟁에서 패하였고, 굴욕적인 협상안이 강요되던 시기였다. 천주교 측에서는 두 가지 개혁만 인정하고, 새로운 결론이 도출될 때까지 어떠한 개혁도 진전시키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찬에서 평신도에게 잔을 분배하는 것과, 교역자의 결혼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니 허용하지만, 다른 개혁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멜랑히톤을 비롯하여 대부분 개혁자들이 현실적인 선택을 하려 하였다.

형세가 불리하니 인내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제후들은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배신과 협상을 반복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플라키우스는 고집스럽게 루터의 뜻을 분명히 계승하는 쪽을 취하였다. 전선이 형성되고 굴복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양보한다는 것은 실제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주장이었다.

타협하지 않고 초지일관하려는 그의 생각은 많은 어려움을 만들어 냈다. 유연한 사고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고수하려는 그의 주장은 협상의 걸림돌이 되기가 일쑤였다. 많은 개혁자들이 중심을 잃었다고 그는 비난하였다. 대신 그는 대다수 개혁자들로부터 소외되었고, 이단으로 몰리는 경우도 있었다. 과유불급인가? 

그의 성격적 결함을 지적하는 후세의 사가들도 있다. 그러나 그의 외로운 활약에 의지해서 루터교회가 그 순수성을 지켰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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