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멜랑히톤/현대식 대학교육의 초석을 놓다

(6) 멜랑히톤/현대식 대학교육의 초석을 놓다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김인주 목사
2016년 02월 17일(수) 10:18

멜랑히톤(1497-1560)이 2월 16일 독일 서남부의 작은 도시 브레텐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주목을 받았으며, 나이가 적어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거절될 정도로 뛰어난 학생이었다.

새롭게 창설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고전어 교육을 위해 당시 독일의 최고 인문주의자 로이힐린을 초빙하였다. 그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양했으며, 대신 멜랑히톤을 추천하였다. 두 사람이 먼 인척이라고 추측되지만, 확실하게 짚어 말하기에는 뚜렷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이제 막 종교개혁을 시작한 비텐베르크에 부임한 멜랑히톤은 대학교육의 개혁이라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고 여러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개혁을 자문하였다. 그래서 그는 독일인의 스승으로 인정받았다.

매우 인기있는 강의로 청중들을 사로잡았고, 루터의 신학사상을 다듬는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루터 혹은 루터교회의 중심적인 사상들이 실제 그의 협력이 없었다면 제대로 구성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는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고, 임직을 받지도 않았다. 그러나 신학교수로서 명성을 얻었다. 비텐베르크 시민교회(중앙교회)의 제단화 왼쪽 그림에는 멜랑히톤이 유아세례를 주는 장면을 그려져 있다.<사진> 가끔은 그가 설교하고, 성례전을 집례하였는지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루터 사망이후에는 정통성 논쟁이 심하게 일어났다. 멜랑히톤 자신도 루터의 신학에서 벗어났다는 지적을 받았고, 그의 생각을 지지하는 신학자들은 겉으로는 루터를 따르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깔뱅을 대변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부인은 귀족이었고 같은 나이였다. 이름은 루터의 아내와 같은 카타리나였다. 남편들이 서로 협력하여 종교개혁을 진행시켰던 것과는 달리, 두 여인은 서로 굽히기를 싫어하여 원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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