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되는 사업

이관되는 사업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6년 01월 13일(수) 09:44

작은자복지선교회 창립예배는 보름 정도 연기돼 1991년 5월 27일에 드려졌다. KNH 대표는 사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이날 모임 장소엔 한아협 사업과 관련된 사진들이 전시됐다. 이를 통해 한아협의 역사가 참석자들에게 잘 전달됐다. 이 사진 전시는 새롭게 발족된 '작은자복지선교회'가 한아협의 사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기관임을 암시하기도 했다. 

창립예배에선 유의웅 이사장의 인사가 있었고, 예장 총회 정봉덕 총무의 기도와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이혜숙 이사의 성경봉독, 작은자후원회의 찬양, 김윤식 부총회장의 '예수의 말씀' 제하의 설교, 황화자 총무의 경과보고, 림인식 증경총회장의 축도가 이어졌다. 연이어 서기 손인웅 목사가 광고했으며, 모든 순서가 끝난 후 참석자들은 다과를 나누었다. 

작은자복지선교회 창립 후 처음 발행된 '선교와 사회복지' 1991년 5~6월호에선 "본회는 사회복지사업을 한국교회 내의 목회적 사업으로 확산하기 위해 '작은자복지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창립 예배를 드렸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1974년부터 독일 선교기관인 KNH의 도움으로 시작된 아동복지선교기관이 한국 교회 내에 작은자운동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한지도 이미 16년이 지나 한국교회의 사업이 됐음을 강조했다. 당시 기사와 글들을 종합해 보면 작은자복지선교회는 KNH에서 시작됐으며 한아협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 선교회의 목적은 한아협 사업 중 하나로 시작된 작은자운동의 확산과 교회가 사회복지사업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작은자복지선교회가 발족된 후에도 한아협 임원회는 1991년 8월 한 번 더 열렸다. 여기에선 1990년 여름부터 KNH의 후원을 받기 시작한 소성교회 유아원이 교사의 이직과 주민들의 잦은 이사로 운영이 어렵다는 보고도 있었다. 이에 국내 모금을 통해 새로운 장소를 구할 수 있도록 후원하기로 하고 KNH 후원을 1991년 전반기에 종료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함께 한아협 사무실 임대보증금 문제가 논의됐으나 작은자복지선교회 안건으로 이관됐다. 그리고 1992년 1월 24일 한아협 총회 이후 한아협 회의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한아협 마지막 총회에서 황화자 총무는 KNH 후원 감소에 따른 사무행정비 부족분은 작은자복지선교회 이사들의 특별찬조금으로 충당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한아협 담당 간사가 1991년 퇴직했으나 KNH 업무를 위해 주 1회 근무하기로 했다는 보고도 있었다. 이러한 보고들은 한아협 사업이 점점 마무리되고, 작은자복지선교회로 이관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한아협이 마무리되는 동안 공교롭게도 1973년 우리나라 청계천을 방문해 후원을 결정하고 한아협 발족과 사업들을 도왔던 KNH 루어스 총무도 KNH에서 퇴직했다. 한아협 산하 시설 관계자들은 루어스 총무의 수고에 감사하며 선물을 준비했다. 이 회의에서는 한아협 임원회 또한 년 4회에서 2회로 줄여 상하반기에 1회씩 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후에 임원회가 거의 열리지 못한 관계로 이 결정은 실현되지 못했다. 1993년에는 한아협 총회도 열리지 않았다. KNH 후원금 관련 보고만 작은자복지선교회 결산보고서에 포함됐다. 

1992년 1월 총회 이후 한아협 회의가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된 이유는 
1992년 2월에 황화자 총무가 KNH 총무에게 보낸 편지에서 간접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루어스 총무가 퇴직한 후 새로 임명된 KNH 총무는 보숄 
드(Frank Boshhold)였다. 황화자 총무는 그에게 "작은자운동은 KNH가 낳은 작품 중에 하나"라고 소개했다. 

 /여전도회작은자복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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