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신학의 정수, 슈말칼덴 신조(1)

루터신학의 정수, 슈말칼덴 신조(1)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김인주 목사
2016년 01월 05일(화) 16:58

1537년 1월 3일 루터는 슈말칼덴 신조를 작성하여, 선제후에게 보내었다. 당시 개혁자는 중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고, 회복이 쉽지 않다고 생각되던 때였다.

루터가 사망한 이후의 상황을 불안하게 전망하는 선제후는 서둘러 개혁의 핵심을 분명하게 천명하도록 요구하였다. 1530년에는 멜랑히톤이 아우그스부르크 신조를 통하여 개혁진영의 신학이 로마천주교 전통과 그리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목표가 달라졌다. 교황청에 의해 소집된 만투아 공의회를 앞두고서,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필요했다. 이 기회에, 루터는 자신의 신학을 명료하게 서술하였으며, 이는 곧 유언장으로 여겨졌다.

슈말칼덴은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소읍이었다. 종교개혁의 양대 세력인 작센과 헷센이 만나기 쉬운 중간지점이었기에 선택되었다. 황제가 언제 국법을 명분삼아 공격할지 모르던 시절, 개신교측의 방어 동맹이 결성되었다. 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리라는 긴장은 늘 유지되었다. 심지어 개신교 영주들 사이에서는, 선제공격을 통해 전쟁의 피해를 미리 제거하자는 전략이 거론될 정도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개혁의 본래의 뜻은 사라지고, 제후들은 여러 가지 세속적인 야욕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헷센의 필립은 이중결혼을 통하여 개혁진영의 도덕성을 크게 실추시켰다. 작센의 공작 모리츠는 황제와의 비밀리에 협상하여 전쟁에 불참하는 대신 선제후 직위를 약속받았다. 루터가 사망한 다음 벌어진 슈말칼덴 전쟁에서, 개신교 제후들은 패퇴하였고 항복하였다. 루터는 슈말칼덴 신조를 저술한 이후, 염려와는 달리, 10년을 더 살았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통하여 이만큼 자신의 신학을 집중적으로 정리하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봉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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