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팔라틴, 종교개혁의 막후 조정자(2)

슈팔라틴, 종교개혁의 막후 조정자(2)

[ 김인주 목사의 이주의인물 ]

김인주 목사
2016년 01월 05일(화) 16:57

게오르그 슈팔라틴(1484~1545)은 비텐베르크 궁정에서 가정교사, 사서로 일한 성직자였다. 선제후의 비서 역할도 맡고 있어서, 교회개혁의 진행은 그의 판단이 결정적인 변수가 되기도 하였다.

개혁자들과 선제후는 가까운 곳에 있지만,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 루터를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지지했다는 것을 직접 소통하거나 의논하였다고 생각한다면 오해이다. 모든 일은 슈팔라틴이 중재하였다. 아직도 중세의 사고를 갖고 있는 선제후를 꾸준히 설득하였다. 그 결과, 영주는 개혁의 진전을 가로막지 않았는데, 마치 큰 도움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결과를 낳았다.

본 이름은 부르크하르트인데, 뉘른베르크 남서쪽에 있는 슈팔트 출신이어서 슈팔라틴으로 불리웠다.

고향이 별칭으로 사용되다가 이름을 대신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칼슈타트도 출신 도시가 이름으로 굳었고, 크라나흐는 크로나흐라는 동네 이름을 살짝 비틀어 부른 것이다. 이름을 라틴어나 헬라어로 부르던 것이 당시 교양인들의 유행이었다.

슈팔라틴은 생몰연도가 루터와 매우 비슷하여 서로 잘 통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회의와 논쟁에 그가 동행하거나 참여하였다. 역사 현장에서의 그의 선택은 제후의 의견을 대신하게 되었다. 보름스 의회에서 루터는 황제에 의하여 추방당하였고, 바르트부르크 성에 일 년 가까이 숨어 지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피습 당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 납치극을 연출하여 개혁자를 보호한 것이 슈팔라틴이었다. 선제후는 그 계획을 세세하게 확인하지 않고, 일임하였다. 그만큼 영주의 신뢰는 확고했다. 그의 생일은 1월 17일, 사망일은 1월 16일이다.     <봉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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