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선교적 사명 부여, 감사와 기쁨의 축제로

(42)선교적 사명 부여, 감사와 기쁨의 축제로

[ 이야기가 있는 예배 ]

김명실 교수
2015년 11월 10일(화) 16:37

다음세대를 세우기 위한 예배에 대해 자문을 받을 때마다, 필자가 제안하는 것 중 하나는 유아세례를 받았던 청소년들의 입교예식을 새롭게 꾸며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 대부분은 청소년 입교예식을 매우 엄격하고 경직된 분위기에서 진행하는데, 그것은 입교예식을 청소년 자신의 신앙을 증명해 보여야하는 하나의 시험의 장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 시험에 통과한 자에게만 성찬참여의 권리와 교회정치의 투표권이 주어진다는 이해가 자연스럽게 청소년 입교예식을 엄격하고 경직된 것으로 만든다. 이 예식에서 청소년들은 "예"라는 대답만 반복하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수동적인 존재이며, 성실한 답변을 마친 후에야 집례자는 그들이 비로소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그런데 사실상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유아세례시에 이미 삼위일체 이름으로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고 선포되었기 때문에 중복된 선포라고 할 수 있다.

성찬권과 투표권은 입교와 함께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 유아세례와 함께 받았던 것이 장성할 때까지 유보되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것을 돌려주는 것이 입교예식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시험을 통과해야하는 엄격한 시간이 아니라 권리를 돌려받는 감사와 기쁨의 축제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엄밀히 말해 '입교'라는 용어도 신학적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고민은 다만 한국 개신교의 고민만은 아니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유아세례만으로도 세례가 완성 되었음을 강조하며, 이 '입교(컨퍼메이션, confirmation)'를 세례의 완성으로 보았던 로마 가톨릭을 비판하였다. 한국 천주교는 이 컨퍼메이션을 '견신례'라고 부른다.

루터와 함께 개혁했던 동료들은 이 견신례를 없애자고 주장했으나, 루터는 유아세례자들이 청소년이 되었을 때 회중들 앞에 서서 자신의 신앙을 직접 고백할 수 있는 교육의 기회로 남겨두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행하는 단순한 질문과 답변의 형태가 아니라, 이야기하는 간증의 형태였다. 교육적 안목이 탁월한 루터였지만, 당시에 컨퍼메이션이라는 용어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 입교예식에 대한 개혁전통의 발전을 저해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면서부터 개혁전통을 포함한 개신교 교파들이 컨퍼메이션이라는 용어를 유아세례 후 '첫 번째 신앙고백(first procession)' 혹은 '첫 번째 공언(first affirmation)' 등으로 바꾸면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의도를 회복하고, 이미 교회 구성원이었던 유아의 장성함을 축하하고 선교적 사명을 부여하는 축제적 의례로 발전시키는 노력을 계속 해오고 있다. 이것은 저출산 등의 문제로 다음세대를 걱정하고 있는 한국교회에서도 반드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움직임이다.

한편, 20세기 초반에 로마 가톨릭에서도 견신례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입장을 정리하였다. 유아세례 자체로 세례가 완성되고 그리하여 성찬을 수여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견신례는 세례와 성찬처럼 여전히 성례(sacrament)의 자리를 지키지만 선교적 사명을 부여하는 예식으로 발전시켰다.

견신례에서 고대부터 사용하던 기름부음은 선교적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성령님이 함께 한다는 표징으로 이해하며 계속 실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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