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평화의 인사'와 '대영광송'의 예배신학적 상관관계

<38> '평화의 인사'와 '대영광송'의 예배신학적 상관관계

[ 이야기가 있는 예배 ] 이야기가 있는 예배와 목회

김명실 교수
2015년 10월 12일(월) 18:56
▲ 평화의 인사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를 하고 있는 북미 교회들의 모습.

죄의 고백과 용서의 말씀 후에, '평화의 인사'와 '대영광송'이 이어지며 공예배의 제 1막이 끝난다. 고백-용서-평화-대영광송의 각 요소들은 기독교 초기교회부터 있었지만, 이처럼 재배열된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영향이며 현대예배신학의 긍정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 칼빈도 시편을 토대로 만든 대영광송들을 용서의 말씀 후에 꼭 넣었는데, 안타까운 것은 한국교회의 예배에서 이러한 구조를 찾아보기가 거의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조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로 평화의 문법이다. 주님께 용서받은 각 사람들은 함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상호 전달하는 것이다. 이때 전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나 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바로 '그 평화(The Peace)'인 것이다. 죄의 고백과 용서의 시간이 하나님과의 화해에 초점을 둔 것이라면, 평화의 인사는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서의 화해에 초점을 둔 것이다. 기독교예배는 그 초기부터 하나님과의 평화는 물론 예배하는 자들 사이에서의 평화도 함께 지향되어 왔다.

주님께 받은 평화가 서로 교환된 후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찬양이 이어지는데, 성부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소영광송(Gloria Patri)'과 삼위일체 모두에게 영광을 돌리는 '대영광송(Gloria in Excelsis Deo)'이 있다. 삼위일체 신학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현대 기독교예배는 대영광송을 더 선호한다. 화해와 일치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의 평화가 되어주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한국 찬송가의 앞부분에 수록된 삼위일체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들이 이 자리에 적합한 찬송들이다.
이러한 배치는 '하늘의 영광'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평화'에 대한 누가복음 2장 14절의 언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암시한다. 즉, 이 땅의 평화와 하늘의 영광은 서로 깊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땅의 평화 없이 진정한 하늘의 영광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일 수 있다. 한편, 어떤 교단들의 예식서에는 '평화의 인사'나 '영광송'이 말씀의 예전이나 성례전 속에 배치되어 또 다른 내러티브를 구성하기도 한다. 어떤 위치에 오든지 '사람들 사이의 평화'와 '하늘의 영광' 사이의 신학적 관련성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실제 예배 속에서 어떻게 평화의 인사를 진행해야하는가? 평화의 인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교환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기에, 개인적인 인사말이 아니라 "주님의 평화가 임하시길 바랍니다" 등과 같은 표현이 적합하다. 너무 많은 움직임은 예배의 흐름을 깰 수 있기에, 악수하기 위해 손을 뻗을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사람들과만 인사를 나눔이 적절할 것이다. 이 때 예배 인도자는 요한복음 13장 34절과 같은 사랑에 대한 주님의 권면을 통해 평화의 인사를 독려할 수 있다.

끝으로 예배신학자로서의 당부가 있다. '평화의 인사'와 '대영광송'을 '성도의 교제'나 '교회소식' 등의 순서들로 대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들도 예배의 중요한 요소들이지만 예수님의 평화를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이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평화의 인사와 대영광송의 이 위대한 신학적 내러티브가 우리의 예배 속에서도 꼭 들려질 수 있기를 바란다.

김명실 교수 / 영남신대ㆍ예배와설교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