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전사적 협상관

북한의 전사적 협상관

[ 김 대사의 북한 엿보기 ]

김명배 대사
2015년 04월 14일(화) 14:02

김명배
前 주 브라질 대사ㆍ예수소망교회

영국의 세계적인 정치학자 해럴드 니콜슨(Harold Nicolson) 경은 불후의 명저 '디플로머시(Diplomacy)'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의 협상을 상인적 협상과 전사적 협상으로 구별했다. 전자는 상거래에서와 같이 '기브 앤 테이크', 타협과 절충을 전제로 협상이 이뤄지는 반면, 후자는 전투에서와 같이 '올 오아 낫씽(all or nothing)' 즉 '이기느냐, 지느냐'를 전제로 협상이 이루어 지는 점에서 양자는 상극의 성격을 띠고 있다. 북한이 구사하는 협상 형태가 전형적인 전사적 협상이다. 

내가 주 러시아 대사관 근무 시절 절친하게 지냈던 아주국장 벨리(Bely) 대사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다. 북한이 구 소련과의 협상에서 한 번도 이겨본 일이 없다는 얘기였다. 이유인즉슨 공산주의 종주국으로서 북한의 전사적 협상술을 익히 알고 있는 소련은 북한과의 협상 시 "우리 입장은 이것이니 받을려면 받고, 안 받을려면 받지 말라"라고 일단 북한 측에 통보한 후 요지부동이었다는 것이다. 북한이 온갖 술책을 다 동원하다가 제풀에 꺾여 소련의 입장을 수용하는 선에서 항상 협상이 이뤄졌다는 얘기였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전사적 협상술의 창시자인 레닌의 후예다운 협상술로서 북한을 제압한 사실에서 우리가 대북협상에서 필히 유념해야 할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벨리 대사가 아주국장 근무를 마치고 주 싱가폴 대사로 부임하기 전 필자가 오찬에 초대해 그간의 우정에 감사하고 "국장 재임 기간 경험에 비추어 한국 외교에 도움이 될 솔직한 얘기를 듣고 싶다"고 말하자, 동 대사는 북핵 문제와 관련해 러시아는 '국제 핵 확산 방지'라는 원칙에 입각해서 처음부터 핵 폐기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했음에 반해, 중국은 시종일관 애매모호한 태도 (ambiguity)를 유지함으로써 한국 정부는 러시아의 협조를 당연시하면서 오로지 중국의 지지를 얻는 데에만 외교적 노력을 집중한 사실을 언급하며, 러시아 외무성 내에 '자성론'이 대두되고 있고 앞으로 북핵 문제가 다시 제기될 경우 러시아가 모호한 태도를 유지할 가능성이 있고, 나아가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통하여 러시아의 외교적 '지렛대(leverage)'를 강화하는 쪽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있음을 한국정부가 유념해야 될 것이라는 충고를 해 주었다. 

나는 이 내용을 본부에 보고했고, 본부로부터 도움이 되는 보고라는 차관 명의의 격려 전문을 받기도 했다. 이후 북핵 문제와 관련해 러시아의 외교는 그렇게 전개됐고, 이후 '북 편향 남북 등거리 외교'를 펴고 있다. 후일 주일대사로 영전한 동 대사의 우정 어린 충고에 지금도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레닌이즘에 충실한 북한 위정자들은 "협상과정에서 이루어진 어떠한 불법도 혁명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라는 레닌의 협상관을 금과옥조처럼 신봉한다. 레닌은 "협상은 전투 역량의 비축 수단이며, 평화는 전쟁 준비를 위한 휴식일 뿐이다"라는 협상관을 갖고 있었다. 모택동은 "협상과 전투는 상호 전화(轉化)한다. 전쟁이 곧 협상이요, 협상이 곧 전쟁이다"라고 자신의 협상관을 피력한 바 있다. 둘 다 북한 위정자들이 금과옥조처럼 신봉하고 실천하는 협상관이다. 

북한정권은 남북한 간에 합의한 협약조차도 한국이 이를 관철할 힘과 의지를 갖고 있지 않으면 서슴 없이 일방적으로 폐기한다. 북한이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1991.12)과 남북 기본합의서(1992.2)를 일방적으로 폐기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며, 우리 정부는 제대로 항의 조차 해본 일이 없다. 남북한 간에 이미 합의한 어떠한 협약도 '남조선 적화통일'이라는 혁명 목표 실현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주저 없이 폐기하며, 이러한 불법행위가 혁명의 이름으로 정당화, 합법화 된다고 믿는 북한 지도부의 협상관을 알고, 대북 협상은 힘을 배경으로 한 관철 의지를 갖는 것이 필수적 요소임을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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