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만남

[ 목양칼럼 ] 목양칼럼

김성태 목사
2015년 03월 09일(월) 16:34

사람은 누구나 1차로 부모님과의 만남을 갖는다. 자의든 타의든 어느 부모님을 만나느냐에 따라 신분도 달라지고 직위도 달라지고 명함도 달라진다. 성장하면서 가르침을 받는다. 2차로 스승과의 만남이다. 맹모삼천지교의 가르침의 교훈을 우리 모두 거울로 삼고 있다. 신사임당의 가르침도 너무나 귀한 훈육이다. 한나의 가르침으로 사무엘이 되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 제자들도 스승과의 만남으로 인해 상상할 수 없는 변화의 주인공이 된 사람들이다. 공자는 제자의 수만 삼천명이 되었다고 한다.

선남선녀로 자라게 되면 사람은 제3차의 만남을 맞이하게 된다. 결혼이다. 어느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명암이 엇갈리게 된다. 항공사 직원을 만나면 비행기를 타고 온 세계를 날아다닌다. 뱃사람을 만나면 어부의 아내가 되어 배를 타고 바다로 함께 간다. 농사꾼을 만나면 농군의 아내가 되어 경운기를 타고 논밭으로 함께 간다. 신앙인을 만나면 구원열차를 타고 하늘나라 간다.

필자는 자주 이 내용을 결혼식 주례로 쓰고 있다. 만남에도 질이 있고, 격이 있고, 승패가 있다. 어느 노처녀 노 가수는 '만남'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우연이 아닌 필연의 만남을 가져 방송가의 스타부부로 알콩 달콩 사는 것을 본다.

이외에 이런 만남도 있다. 배터리와 같은 만남, 약 떨어지면 끊어지는 만남, 돈 떨어지면, 인기 떨어지면 끝나는 만남. 생선 같은 만남은 만날수록 싱싱하지 않다. 비린내가 난다. 끝내는 냄새가 나 코를 들 수가 없다. 꽃과 같은 만남은 향기 있을 때, 활짝 필 때 뿐이라 할 수 있다. 지우개 같은 만남은 상황 따라 없었던 것으로 하자하고 지워버린다. 잊어버린다. 너무 많이 지워버려 '이혼 풍년'이 되었다.

한편 손수건 같은 만남, 씻겨주고 닦아주고 붙들어 주는 만남이 있다.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상처도, 눈물도, 콧물도, 땀도 닦아주고 싸매어준다. 때 묻은 손도 얼굴도 닦아준다. 결혼 주례를 할 때 신혼부부에게 부탁한다. 서로 손을 꼭 잡고 손수건 같은 만남을 갖게 되면 최고의 만남이 될 거라고.

교회도 만남으로 이뤄진다. 그렇다면 어떤 만남이 되어야 할까. 서애 유성룡 선생은 군자들의 사귐을 옥에 비유하고 소인들의 사귐을 모래에 비유하여 설명하다. '비옥취사'라는 말이다. '만날(比)비', '구슬(玉)옥', 군자의 만남은 옥이 서로 만나는 것처럼 서로를 밝혀주고 자신의 빛을 유지한다. 소인의 만남은 모래가 서로 섞이는 것처럼 잘부서진다. '모일(聚)취', '모래(沙)사'.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6-7)라는 말씀으로 만남을 정의하고 싶다.

그리스도인은 빛의 만남이고 영적인 만남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뤄지는 만남이다. 베드로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하나님을 만났고 기도 중에 고넬료를 만났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기도 중에 아나니아를 만나 눈이 뜨여지고 루디아를 만나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를 만났다. 고린도에서는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만났다. 혈연 지연 학연이 아니다. 율법 인본적인 만남이 아니다. 우리는 특히 교회에는 이런 만남으로 사도행전을 써야한다. 이것이 4차원의 만남이다. 이 만남이 변화를 일으키고 역사를 일으킨다.

김성태 목사 / 본향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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