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수선화

'내' 안에 수선화

[ 주필칼럼 ] 주필칼럼

이홍정 목사
2015년 03월 04일(수) 10:50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의 이름을 따서 독일의 네케가 만든 용어로 자신의 외모나 능력을 병리적으로 사랑하는 과잉된 자기중심성, 즉 자아도취적 자기애를 말한다. 신화의 한 이야기는 나르키소스는 모두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으나 이를 거부한 결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고통을 벌로 받고,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다 물에 빠져 죽는다고 전한다.
 
자아도취적 자기애는 인간의 부정성이 지니는 심리적 문제로, 완벽주의에 경도된 채 자만심과 우월감에 빠져 자기에게서 시작과 끝을 이루는 직선적 완결구조를 형성하려는 태도를 포함한다.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해 무지하므로 그리스도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하나님의 판단을 인정할 수 없었던 사탄의 본성은 인간의 악한 심성과 행위의 근원이 된다. 나르시스적 인간은 자신의 완벽한 자아상 표출에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성찰 대신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애매한 희생양을 만들어 이를 극복하려 하는데, 이런 악순환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인간의 죄악된 문화는 번성해간다.
 
한국교회 안에 내재된 유교적 가부장적 문화는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의존과 복종, 수평적 소통과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의 부족, 억압적 감정 절제 등을 조장하기 쉬운데, 이런 환경 속에서 교회지도자들 안에 있는 나르시시즘은 병리적 현상으로 발전되어 표출되기 쉽다. 가부장적 나르시스적 교회지도자들이 하나님과 교회를 명분으로 공적 영역에서 자기성취와 자기과시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과정에서 그들의 나르시시즘을 보호하기 위한 비본질적 안전장치들이 설치되고, 구성원들은 반 지성주의에 경도된 채 복종적 참여를 강요받는다.
 
간혹 몇 몇 자수성가형 교회지도자들의 경우,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독점과 사유화의 욕구로 인해 왕왕 자신들을 교회와 기관의 소유주로 생각하고 주변에 유사 '친위대'를 배치하여 운영권을 독점하므로 집단적 지성의 창출과 지도력 이양에 어려움을 자초한다. 자기 의와 자기연민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성직자의 특권의식과 영적 권위로 자신들을 포장한 채, 구성원들을 자신들의 욕구 실현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신앙공동체 안에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세속화 현상을 가속화시키며, 고뇌하는 신앙인들의 이탈을 방치한다. 한국교회의 성장둔화와 윤리적 타락과 사회적 신뢰 약화의 뒤안길에는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 교회지도자들의 나르시스적 병리현상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나르시시즘을 양산하는 한국교회의 문화와 목회구조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육신적이며 생태적인 자기 비움과 상호의존성의 영성의 빛 아래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내 안의 완결구조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판단하고 모든 구성원들을 다스릴 수 있다는 제왕적 대상화의 망상에서 깨어나, 구성원들의 공동체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은사를 개발하면서 집단지혜를 발전시키는 유기적이고 공동체적인 목회의 돌봄이 필요하다. 구성원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비판하고 지도하고 가르치려는 태도와 신앙의 이름 아래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려는 미망에서 벗어나, 더불어 소통하고 공감하므로 함께 배우고 실천하며 성찰하는 모습으로 전환해야 한다.

목회기술자가 아니라 인생이라는 순례의 여정에 친구로 동행하는 지도자, 일방적 지시와 전달보다는 낮은 자세의 경청과 수평적 대화를 통해 영적 현자로 말씀의 지혜를 나누는 지도자, 자신이 세운 목표와 결정을 중시한 나머지 기존의 다른 것들은 무효화하고 자신의 시간의 흐름과 목표에 추종할 것을 강요하는 대신에 구성원들의 삶과 사역의 자리에서 공존의 상관성을 만들고 치유와 화해의 생명 망을 짜가며 함께 춤추며 이끄는 지도자, 경력과 인맥과 덧칠한 무용담을 과시하며 그것을 권위의 근거로 삼기보다는 언제나 수줍은 첫 만남을 준비하는 아마추어의 자세로 일상을 살아가는 지도자, 성령의 역사보다 앞서서 문제해결사로 스스로를 자처하며 나서기 보다는 성령의 역사에 공동의 탐구자로 참여하는 지도자, 성급한 자기 판단을 앞세워 자기 방어적 변증과 공격적 처세로 대처하기 보다는 침묵 가운데 사과와 용서로 낮아지며 갈등의 사이에 서서 치유와 화해의 과정을 모색하므로 공동체의 진보를 이루는 포용적 지도자, 독무대를 차리고 나르시스적 원 맨 쇼를 연출하기 보다는 팀워크를 이루며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지도자 -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공동체의 전 구성원이 하나님의 정치와 선교와 목회에 참여할 것을 요청 받는 이 시대의 교회지도자들의 상식이 되어야 한다.
 
신화의 또 다른 이야기는 이렇게 결말을 맺는다. 나르키소스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흐트러져버리고 너무 멀리 물러서면 사라져버리는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떠나지 못한 채, 헛되이 그것을 껴안아보려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물가에 누워 있다가 점점 힘을 잃고 시들어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그 후 수선화가 피었다. 오늘 이 '수선화'는 '내' 자신에 대한 성찰의 징표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내'안에 수행의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다. '내'안에 '수선화'가 군락을 이룬 채 시들어 가고 있다. 아, 하나님,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홍정 목사 / 총회 사무총장ㆍ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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