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샤를리다"

"나는 샤를리다"

[ 기고 ]

박상기 목사
2015년 02월 25일(수) 11:42

 
'샤를리 엡도'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풍자 비판 전문 주간지의 이름이다. 유명 정치인, 유대교, 가톨릭 등을 대상으로 한 과감한 만평들로 이미 유명세를 탔고 1992년 '샤르보니에'가 편집장으로 취임하면서 이슬람교를 대상으로 한 풍자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주간지다. 특히 이슬람의 성자로 추앙받는 '무함마드'가 성적 자세를 취한 모습을 만평으로 올린 후에 프랑스 내 이슬람계의 거센 항의를 받았지만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를 앞세워 계속하여 이슬람을 비평하다가 지난 7일 이슬람 무장 괴한들이 침입하여 총격을 가해 12명이 숨지는 최악의 언론사 테러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프랑스 사람들 뿐 아니라 세계 각처에서 테러를 규탄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등 반 이슬람 정서에 불을 붙였는데 각 언론사는 테러를 규탄 하는 만평을 실었고 사람들은 "Je Suis Charlie"(즈 쉬 샤를리) 즉 "나는 샤를리다"를 외치며 언론에 대한 폭력과 테러에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한편 극단적 이슬람주의, 반인륜적 폭력, 반사회적 테러리즘 등에는 반대하지만 종교적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는 극단적인 풍자에는 동의할 수 없으며 표현의 자유가 신념의 자유를 비판하고 조롱해서는 안 된다는 맥락에서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Je ne suis pas charlie)를 외치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
 
종교는 문화의 울타리 안에 있는 하나의 컨텐츠가 아니다. 인간의 문화를 만들어 내는 촉매요, 원인으로서의 위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든 우습게 종교를 판단하고 매도하는 것은 심각한 반발에 부딪힐 우려가 그만큼 큰 것이다. '신념'이란 곧 '생명'과 같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종교적 신념'은 단순한 사상이나 이데올로기, 또한 취미나 문화적 정서를 넘어 선 정신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념에 목숨을 거는 일들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념을 건드는 것은 치명적인 뇌관을 건드리는 것과 같다. 분명히 이번 '샤를리 엡도'에 대한 테러도 그 같은 차원에서 이뤄졌을 것이 틀림없다.
 
한편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단순한 종교의 차원을 넘어 '생명'이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믿는다. 그러므로 타 종교는 선택과 타협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기독교 신앙은 결코 타협이 불가하다. 때문에 '독선' '아집' '이기적'이란 비판들을 지금껏 들어왔고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 유일하게 타 종교와의 대화가 쉽지 않은 도그마가 강한 종교로 분류 되어왔다. 또한 이 같은 타협 없는 신앙은 이제껏 수 없이 많은 순교자를 낳기도 했으며 지금도 믿는다는 이유로 말 할 수 없는 냉대와 불이익, 그리고 박해를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모든 박해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맞서왔다. 과거 신앙이 왜곡되게 표현 되었던 십자군전쟁이라는 어두운 역사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고 생명을 해치는 일은 없었으며 혹 있더라도 그것은 결코 올바른 기독교신앙의 표현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빛과 소금'과 같은 자기희생과 '자기부정'을 통하여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정신이 다른 모든 종교와 는 근본적인 차별을 지닌다고 하겠다.
 
금번 '샤를리 엡도'테러 사태를 통하여 "나는 샤를리다"라는 쪽과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라는 극단으로 신념이 양분되었다. 한 쪽은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이고, 다른 한쪽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신념의 자유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둘 다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무거운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한 쪽은 테러에 대한 부담이고 또 다른 한 쪽은 폭력을 용인한 데 대한 비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감한 사건에 침묵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확실하게 밝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두운 시대에 그 정체성이 가려져 존재적 위치를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절대 진리에 근거한 신앙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소명을 갖고서도 불의에 침묵하고 불법에 쉬쉬하는 현세 지향적인 삶의 태도에 대한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된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 말 아래 감춰져 빛의 기능을 상실한 체 세상에 섞여서 적당하게 성속(聖俗)을 오가며 양지만을 지향하는 이중적인 삶에 대한 부끄러움까지 느끼게 된다. 어두움의 한 복판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빛 된 자신의 정체성을 목숨을 걸고 드러내는 예수님의 제자가 그리운 시대를 살고 있다.  
 
박상기 목사/빛내리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