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성경 구락부

청소년 성경 구락부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5년 02월 10일(화) 15:42

사단법인 대한청소년 성경구락부에서는 1974년 7월 1일 성경구락부 설립을 승인해주었고 명칭을 '제일중고등성경구락부'라 하였다. 무인가, 무허가 학교였던 이 학교가 이로써 소속이 생기게 되었다. 학교 입구에는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맨 위에는 '활민부국', 오른쪽 기둥에는 '대한청소년 성경구락부 제일실업중고, 성남근로자청소년학교, 교훈, 깨닫자 뭉치자 세우자', 왼쪽 기둥에는 '국민 중고등학교 의무교육 자율화연구실험센타'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이것은 '백성이 잘 살아야 복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활민부국(活民富國)'과 '최소한 고등학교까지는 돈이 없어도 누구나 교육받을 수 있는 초중고등학교 의무교육'이 실행되어야 한다는 최규성 교장의 교육 신념이었다.(청소년의 등불, 18) 이 학교를 중심으로 세워진 '머릿돌교회'도 '활민교회'로 개칭되었다.


이후로도 천막학교는 계속 같은 곳에서 유지되었다. 5년 여가 지나자 동네에 가로등이 생기며 신흥주택가로 변모해갔다. 그러나 천막학교의 천막은 낡았고 비가 오는 날이면 책상 밑에 책을 펴놓고 공부하거나 공부하기 전에 교실 바닥에 고인 물을 퍼내야 했다. 심한 소나기로 산에서 황토가 휩쓸려 내려와 교실을 뒤덮으면 비가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업을 계속하기도 했다. 겨울에는 어둡고 차가운 교실에서 손이 얼고 발에 동상이 걸리기도 했다. 그런 곳이었을지라도 학교에 가는 것이 "어찌 그리 좋았는지 모릅니다"라고 훗날에 그 학교 졸업생 정종삼은 회고한다.(청소년의 등불, 9) 이렇게 공부한 학생들이 중학교 과정 졸업식 2회, 고등학교 과정 졸업식 1회를 통해서 1975년 70여 명이 졸업하였다. 이 중 50여 명의 학생들은 중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중앙일보 1976. 11. 29 )


1976년 9월 강렬한 태풍으로 주야간 중등과정 260명, 주야간 고등학교 과정 81명의 교실인 천막 4개동이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경기도 조병규 도지사가 보내 준 천막들이었다. 하나 남은 천막교실로는 학생들이 다 수용되지 못해서 노천교실에서 공부했다. 12세부터 34세까지 망라되어 있는 학생들은 '우리 학교 우리가 짓자'는 마음으로 '1인 10장 벽돌 모으기 운동'을 벌이며 주일에는 머릿돌교회에 모여 예배드렸다. 여학생이 60%이며, 야간 학생이 70%였지만, 학생들은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고 늦은 밤 산비탈을 삽과 괭이로 파서 학교 부지를 닦았다. 여러 도움과 학생들의 노력으로 103평의 교실 4면 벽이 완공되었다. 그런데 1976년 10월, 사유지 무허가 건물이라고 성남시에서 철거 지시가 내려왔다.


철거반이 나오면 학생들은 직장을 결근하면서까지 교실 벽을 팔띠로 가로막았다. 이 소식이 기독공보와 연세동문회보에 실렸다. 이런 상황은 1981년 30만원의 벌금형이 내려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래도 학생들은 계속 공부하였고, 중고등학교 과정 졸업생 100여 명을 배출했다. 그 가운데 2명은 대학 예비고사에 합격하기도 했다. 해마다 중등과정을 이수한 30여 명의 학생들은 기술자로 공업단지에 취직하여 어려운 가정살림을 도왔다. 이들에게 천막학교의 졸업장은 '황금보다 더 빛나'보이는 것이었고, 졸업식장은 "마치 초상집과 같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이 당시 졸업생 정종삼은 20년도 훨씬 지난 후에도 여전히 감격스러워했다.(청소년의 등불, 9) 


/여전도회작은자복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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