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청계천 빈민 선교의 시작

③청계천 빈민 선교의 시작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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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1월 27일(화) 16:53

1971년 시작된 청계천 빈민촌 선교는 망원동 빈민선교와는 조금 달랐다. 망원동 빈민선교가 시작될 때 여러 사람의 협력이 있었다. 그러나 청계천, 정확히 말해서 송정동 74번지 개미마을과 판자촌에서는 김진홍이라는 장로회신학대학원생 혼자 빈민 선교를 시작했다.(김진홍 목사 면담 2014. 5. 29) 그는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에서 6개월 과정 훈련을 받았다. 도시문제연구소 훈련은 1971년에 처음 시작된 도시산업선교 실무자 교육이었다. 이 훈련과정은 1976년까지 계속됐다. 김진홍 전도사가 이 교육을 받은 것은 1971년이었다. 그는 그의 책 '새벽을 깨우리로다(1983년, 홍성사)'에서 이 교육의 경험을 소개했다. 교육생들은 현장실습을 위해 연희동 빈민지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장례를 지내야 하는 한 가정을 만났다. 교육을 지도하던 사람은 교육생들에게 아무런 재정적인 뒷받침도 해주지 않은 채 장례 지내는 일을 도우라고 했다. 이 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든든한 재정적 기반을 갖고 있는 창가학회 사람들이 빈민지역에 얼마나 많이 침투돼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계속 현장을 탐방하던 김진홍 전도사는 청계천으로 갔다. 그곳에서 김종길이란 사람을 통해 결핵환자 김학형을 만났다. 어떻게든지 살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마를 대로 마른 그 사람을 업고 다녔다. 그 사람은 살아났다. 그곳에는 다른 병자도 많았고, 일자리 없는 사람, 일 나가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방치해둔 아이들도 있었다. 김진홍 전도사는 결혼 자금으로 송정동 73번지 13통 4반에 활빈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1971년 10월 3일 창립예배를 드렸다.

활빈교회를 세운 김진홍 전도사는 생활비도 벌고 일자리 없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생각으로 그 지역 사람들과 넝마주이를 시작했다. 주민회도 조직했다. 그리고 영유아, 임산부 건강관리, 결핵퇴치, 가족계획, 보건교육 치과 및 일반진료를 담당하는 건강관리부, 내일을 계획하고 규모 있고 계획성 있는 생활을 위해 협동조합부, 직업훈련 및 가내공업 유치를 위한 생활안정부, 도로관리, 청소소독, 장례, 방범 등을 맡는 개발봉사부, 그리고 주민교육부 등 5개 부로 나눴다. 분과위원장과 간사를 두었다. 주민교육부는 어린이학교, 지역사회학교, 청년강좌, 엄마 교실, 사랑방모임, 새마을강연 등을 추진하는 부서였다. 이 주민교육부 사업 일환으로 어린이집이 설립됐다.

청계천 판자촌 지역에는 오후에 학교를 마치고 오는 초등학생들도 방치돼 있었다. 이들의 밥도 챙겨주고 공부도 도와줄 필요가 있었다. 봉제공장에서 12~16시간씩 일하는 청소년도 있었다.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가 필요했다. 주민교육 사업 일환으로 지역사회학교가 세워졌다. 이름은 배달(Bethel)학당이라 명명됐다. 1972년 3월 13일 개교 예배와 함께 청소년 야간 중학과정 교육이 시작됐다. 이 야학 이사장으로는 당시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대학부 간사인 안재응 씨가 맡았고, 김진홍 전도사는 교장의 일을 맡았다. 30여 명 되는 야학 교사 가운데는 넝마주이 총무를 맡고 있던 제정구와 손학규도 있었다.

청계천 판자촌, 빈민 지역 선교를 위해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김진홍 전도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통해 독일 아동후원단체인 KNH를 소개받았다. 그는 이 단체에 도움을 구하기로 작정하고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목사에게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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