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1970년대 선교정책

②1970년대 선교정책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5년 01월 27일(화) 16:38

1971년대 초 기독교계에서는 선교 100주년을 앞두고 선교정책 재검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71년 12월 24일 '72년 새해 교회의 좌표'라는 좌담회가 총회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 좌담회에는 이종성 장신대 학장, 김윤식 교단 총회 총무, 김형태 총회 서기, 노정현 연세대학교 교무처장, 이화미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총무가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선교 백주년을 향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자세는 사회적, 국가적인, 대사회적 양심을 포괄해서 교회가 그 미션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교회 비전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예배중심의 교회에서 삶의 중심(지역사회 발전을 위한)을 위한 교회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교회의 방향 전환을 제안했다. 방향이 전환된 교회는 "이웃과 함께 해야 하며 또한 예배 중심을 벗어나 사회봉사를 위하는 견지에서 사회의 아픔을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72년 새해 교회의 좌표', 기독공보 1972.1.1). 좌담회의 제안은 1971년 한해를 되돌아보며 새로운 한해를 전망하는 기획기사 전도부편을 통해 조금 더 구체적인 대안으로 바뀌었다. 여기에서는 선교정책 재검토와 농촌교회 자립정책, 도시산업선교 훈련원 신설 및 실무자 양성 등이 요청됐다. 이러한 요청에 부응해 기독공보에는 '지역사회의 기수'라는 연재기사를 통해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소개됐다.

그 첫 번째로 1968년 5월 인간 상록수상을 받은 김석동 목사의 농촌교회 목회활동이 소개됐다(기독공보 1972.1.15). 같은 신문 4, 5면에는 '새시대선교연구회'가 '한국사회와 인간화'란 주제로 1월 6~8일까지 가진 수련회에서 교회, 학원, 산업사회, 군인사회, 소외지대와 인간화란 분과 발제가 있었다는 소식이 실렸다. '새시대선교연구회'는 본교단 30대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모임이었다. 한 주간 후 기독공보에는 대도시와 중도시, 소도시 총 8개 도시 교인표본조사 결과가 실렸다. 이 기사에는 교회는 소외된 계층에서 유리돼 있다는 조사결과가 보고됐다. 이에 따라 "이제 복음 전파의 작전은 육체노동을 해서 수입이 적은 하층 대중에 파고 들어가는 선교가 절실히 요청된다"고 말함으로 선교의 방향 전환 방법이 구체화됐다.

하층 대중에게 파고드는 선교는 1971년부터 이미 청계천 판자촌에서 실현되고 있었다. 1972년에는 망원동 판자촌에서도 복음 전파가 시작됐다. 망원동 빈민선교는 망원동으로 집을 옮긴 장로회신학대학 주선애 교수가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그 지역 상황을 전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주민들에게 성경을 교육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봉사대원 이상향, 정태일, 기현두, 고애신과 주선애 교수는 아동지도 중등교육과정, 성인 부녀지도 뿐 아니라 놀이터 2곳 설치, 다리 가설, 화장실 3개소 개조 등을 했다. 무허가 판자촌에 세워지는 화장실 건축 역시 무허가였기 때문에 "관청에서 못 짓게 할 것을 알고 밤마다 전기 불을 켜놓고 조금씩 지어 갔다(주선애, 주님과 한평생, 256)." 다리 건설도 밤에 이루어졌다. 학교에서 왕복 3시간이 걸렸지만 봉사대원들은 주민조직도 만들고, 가족계획사업도 돕고, 적십자병원의 도움을 받아 무료진료사업도 했다. 이 일을 후원하고 돕는 이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에서 특별히 "마펫 부인, 가미도 목사, 신상길 목사, 황화자 전도사" 등이 이 일에 협조했다(기독공보 73.3.3). 1973년 11월에는 유아원과 탁아소가 개원됐다. (기독공보 73.11.17, 74.9.7)  /여전도회작은자복지재단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