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1970년대의 한국

①1970년대의 한국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차유진 기자 echa@pckworld.com
2015년 01월 27일(화) 16:36

화장실이 없는 동네


독일 아동후원단체인 킨더노트힐페(Kindernothilfe e. V. 이하 KNH)의 사랑이 우리나라 서울 청계천으로 흘러온 것은 1974년의 일이었다. 이 당시 우리나라는 사회적인 측면에서나 신앙적인 측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1962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이 시작되었다. 서울에는 의류나 옷, 가발공장과 같은 노동집약적인 산업체들이 많이 생겼다. 사람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모여들었다. 5년 만에 서울인구는 백만 명이나 급증하였다. 청계천, 중랑천, 정릉천, 망원동, 봉천동, 창신동 등지에는 빈민촌이 생겼다. 청계천 빈민선교가 시작되던 1971년 서울시내 무허가건물은 총 18만 채 정도 되었다.(동아일보 1971. 8. 11.)

 
청계천을 따라 6만 여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이 사는 무허가 집을 우리는 판자집이라 부르고 이들이 살았던 마을을 판잣촌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방 하나, 부엌 하나에서 살았다. 청계천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은 수세식 화장실 이전에 우리나라에 있었던 푸세식 화장실이 아니었다. 장마가 질 때 그 안에 있던 모든 오물을 떠내려 보내는, 일명 우세식 화장실이었다. 이 화장실조차도 개개인의 집에는 없었다. 그래서 화장실 앞에는 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망원동 뚝방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마을을 '화장실이 없는 동네'(주선애, 주님과 한평생, 254)라고 했다. 몽둥이를 세우고 가마니로 막은 몇 곳이 있긴 했으나 그 곳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어서 가까이에 있는 밭에서 용변을 해결하기도 했다. 무허가 판자촌에 새집이 생기거나 보수하기라도 하면 곧바로 철거되었다. 그래서 판자집들은 밤사이에 지어졌다.(김진홍 목사 면담, 2014. 5. 29) 원래 청계천은 자연형태의 하천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서울의 지리적 특성상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물길이 생겼다. 봄과 가을에는 건천이었지만 여름에는 홍수가 날 정도로 유량이 많았다. 그래서 여름만 되면 가옥들은 침수가 되었고, 다리는 유실되고 익사자가 발생하였다. 조선 태종 때부터 정비작업을 해왔지만 조선시대 청계천에는 온갖 쓰레기와 오물이 흘러들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청계천은 도성에서 배출되는 많은 생활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 기능을 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여러 가지 정비계획을 발표했으나 재원 부족과 연이은 전쟁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해방 후 준설이 계획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이 역시 중단되었다. 전쟁 후 서울에 모여든 피난민 가운데 이곳에 판잣집을 짓고 정착한 사람들이 생겼다.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나라의 가난하고 불결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슬럼 지역'이었다.(청계천 모바일, '청계천 역사') 당시 가장 손쉽게 청계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복개였다. 1955년부터 광통교 상류에서 시작된 청계천 복개는 1977년 신답철교까지 복개되었다.

이 무렵 경제개발로 인하여 발생한 이농민들과 사업실패 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왔다.(김종규 면담, 2014. 6. 3) 청계천 복개공사는 계속 진행되었고, 청계천 판자집들은 늘 철거의 위험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마지막 안식처에서 밀려 나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래서 판잣집이 철거되고 나면, 그 자리에는 밤사이에 또 다시 판자집이 얼기설기 세워졌다. 그리고 밤이 되면 여기 저기 보수되었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도록 땅을 파고 거적으로 드나드는 문만 다는 집들도 있었다. 이렇게 형성된 마을을 개미마을이라 했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하나 같이 9.9㎡(3평) 이하 정도의 넓이로 방과 부엌이 구분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까운 강 하구에서 채취한 모래로 블록을 만들고, 그것으로 벽을 만들었다. 주워온 폐자재로 골조를 만들었다.

또 깡통을 모아 연통으로 활용하기도 하고, 일일이 펴고 연결해서 넓게 만든 후 깡통 지붕을 만들기도 했다. 폐지를 주워와 바싹 말린 후 풀칠해 방벽지로 사용했다. 그곳 교회 건물도 일반 판자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합판으로 만들어진 벽, 비닐 창문, 불에 잘 타는 루핑이 덮인 목조 지붕! 주어온 목재들 중 기다란 목재는 교회의 십자가가 되었다.  /여전도회작은자복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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