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스런 '희소성' 가치

의심스런 '희소성' 가치

[ 목양칼럼 ] 목양칼럼

유석균 목사
2015년 01월 26일(월) 19:07

며칠 전 여권을 재발급 받기 위해 구청에 들렀다 나오는 길에 구청 입구 주차 요금 계산대에서 난처한 일을 당했다. 아뿔사! 지갑도 없고 요즈음 그렇게 흔한 동전도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주차 요금은 500원. 모든 주머니며, 차안을 살펴보았지만 그 500원이 없는 것이다. 요금 계산소에는 두 분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안절부절 못하며 허둥대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천천히 찾아보세요"하는 것이다.

아, 그런데 놀랍게도 기적을 맞게 되었다. 운전석 바로 곁에 천 원짜리 지폐가 구겨져 끼어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요금 계산원에게 당당하게 그 지폐를 내밀었다. 그리고 무심코 "잔돈은 그냥 두십시오. 혹시 다음번에 저와 같은 사람이 있으면 그걸로 대신 처리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창문 유리를 올리고 막 출발하려는데 안에서 자기들 끼리 하는 말이 차 안까지 흘러 들어왔다. "가끔 이런 분이 요즘 세상에도 있네!" 그 말은 필자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건 분명 칭송의 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자선가로 산 것도 아니고, 늘 그런 말을 하거나 생각을 품고 다니는 사람이 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의미로 여운을 남겼다. 단 500원으로도 사람으로부터 칭송을 듣다니! 순간, 매 주일마다 진액을 짜가며 준비한 필자의 설교에는 얼마나 감동을 받을까? 단 돈 500원이면 될 것을 말이다. 대단한 설교를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다음은 '가끔'이라는 말이다. '자주'가 아닌 '가끔'이고 있다는 것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서도 남을 생각해 주고, 뒷사람을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말이다. 살기 좋은, 보다 아름다운 세상은 '가끔'이 '자주'가 되고, 자주가 아예 '일상'이 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어느 신학교에는 식권을 놓아두는 상자가 있다고 한다. 고맙게도 그 상자에는 이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가 채워두어 언제나 비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은 것이다.

친구교회 목사님은 교회 자판기 옆에 항상 100원 짜리 동전을 담아 둔단다. 커피 값이 없는 자도 와서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도록 말이다. 어느 달동네 교회는 교회당 건물 뒤 어두컴컴한 모퉁이에다 쌀독에 쌀을 채워두어서 양식이 떨어진 사람은 누구든 필요한 만큼 자유롭게 양식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해 놓았단다. 그런데 이따금씩 믿지 않는 마을 주민도 이 일을 좋게 여겨 오히려 쌀 포대를 갖다 놓고 가는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분명 이런 좋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희소성의 가치' 때문인지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자, 그런데 요즈음 세상형편은 어떤가? 온통 불만이고 불평이다. 피해자는 있어도 가해자는 없다. 손해 본 자는 있어도 은혜 입은 사람은 없다. 그런 뉴스가 아침, 점심, 저녁 신문, TV 화면을 장식한다. 그러다보니 국민 대다수가 불만 불평에 전염되고 있고, 그것에 전문성까지 띠게 된 것 같다. 신뢰가 무너지고, 관계가 파괴되고, 자신의 인격에 금이 가고 있는데도 그 어떤 조치도 없다. 구제역이니, AI 인플루엔자에 대한 대책은 철저하면서도 말이다. 이젠 좀 그런 것에 대한 볼륨을 줄여보자. 이제 불만, 불평에 대한 볼륨을 줄여가고, 불평불만에 대한 차단책을 세워보자. 구제역 확산을 막기 위해 경계지역을 선포하고 철저하게 방역에 치중하듯이 불만 불평에도 그렇게 해보자. 좋은 일들이 '가끔'이 되는 '희소성의 가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도, 이제라도 차안에 5백 원짜리 수십 개를 준비하고 다녀야겠다. '가끔'이 '자주'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유석균 목사 / 병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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