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목양칼럼 ] 목양칼럼

유석균 목사
2015년 01월 19일(월) 15:42

'벌레 먹은 나뭇잎'이라는 이생진씨의 시다. "나뭇잎이 /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 상처 하나 없이 / 매끈한 것은 /어쩐지 /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구멍이 뚫려서 / 그 구멍으로 / 하늘이 보이는 것이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 별처럼 아름답다." 이생진씨는 어떻게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고 하는 것일까? 분명 사람들은 예쁘게 단풍든 잎을 주워서 책갈피 속에 넣어두고 싶어 한다. 그런데 주운 나뭇잎이 벌레 먹었거나 흠집이 있는 것이라면 이내 팽개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생진씨에게서는 달랐다. 벌레 먹은 나뭇잎이 예쁜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한다. 하나는 누군가에게, 그것이 비록 벌레일지라도 먹이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 벌레 먹은 잎사귀 구멍으로 하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심리학자들이나 상담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속에 깊이 들어있는 쓴 뿌리를 빼내야 한다고. 그리고 그 쓴 뿌리는 받은 상처나 충격으로 응어리져 있는 것이라고. 그것 때문에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당하고, 그 상처라는 틀(frame)로 사람이나 모든 사물을 보고 대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볼 수 없게 되어서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더 나아가 전 인류의 역사에서도 큰 비극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와 같은 인물이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하고보면 이와 같은 상처들은 결코 예쁜 것들이 아닌 반드시 치유되어야 할 부정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갈등하게 된다. 한쪽에서는 상처를 금기시 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상처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도 고난을 고통으로 여기고 벗어나게 해 달라고, 없이해 달라고 몸부림치며 간청하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고난이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것은 갈등과 고민의 문제만은 아니다. 해석의 문제다. 상처에 대한 시각과 해석이 곧 상처에 대한 치유이며 해답이다.

벌레 먹은 나뭇잎을 보자. 시인이 만약 자기 몸이 벌레에게 먹혀 상처가 난 것으로 보았다면 예쁘게 보지 않고 가엾고 처량하게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몸을 빼앗아 상처를 준 벌레가 철천지 원수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관점은 달랐다. 나뭇잎이 벌레에게 먹혀버린 것으로 보지 않고, 자기 몸을 벌레에게 내어주어 벌레를 먹여준 삶의 흔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바라보니 장해 보이고 숭고하게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역발상이라고 한다. 기발한 아이디어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이 원래였고 그것이 낯익은 것이었다. 그래서 원 세상은 보시기에 아름다웠다. 그런데 사람들의 삶들이 쇠퇴해 지면서 원래의 일상적인 것들이 특이한 것이 되었고, 낯익은 것이 마치 낯선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오히려 낯설어야 하는 것이 낯익은 것이 되어버린 이것이 현대의 슬픔과 비극이 아니겠는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문제도 많고 탈도 많다. 어디를 가보나 역시 문제도 많고 탈도 많다. 이러면 이래서 문제고 저러면 저래서 탈이라고 한다. 먹으면 먹는다고 문제고 안 먹으면 안 먹는다고 탈이다. 잘 입으면 잘 입는다고 문제이고 잘 안 입으면 잘 안 입는다고 탈이다. 설교를 길게 하면 길게 한다고 문제고 짧게 하면 짧게 한다고 탈이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당연의 문제, 본연의 문제가 아니다. 이탈의 문제며 나중의 문제다. 문제를, 탈을 예쁘게 보고 해석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가는 것이 중요하다. 본래의 것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의 실존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바로 그 하나님의 시각을 회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석균 목사 / 병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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