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좋은 친구는 정확한 지도보다도 더 유익하다는 셰익스피어의 말은 시대를 넘어 지금도 진리인 것 같다. 오늘의 동행은 유난히 문학에 허기지고 목말라 시와 수필로 세상을 아름답고 따뜻하게 쉬임없이 써가는 이 시대의 문인들과 함께하기에 더욱 값지고 소중한 여행이다. 여행이란 떠남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요 탈출이다. 매일 반복되던 그 길을 벗어나서 다른 장소에서 맞는 아침과 잠자리 그것이 여행이라 했다.
　
최근 나는 어릴적 소풍전야처럼 마냥 설레임만 한 아름 안고 그리던 하동에 당도했다. 섬진강 아침 물안개가 뽀얗게 피어오르고 바람이 싱그러웠다. 처음 이곳에 온 나의 벅찬 감동은 어제밤 하늘 먹구름 활짝 개인 날씨도， 짙게 물든 늦가을 풍경도 아닌 단 두 가지였다.
　
그것은 이 시대에 걸출한 수필문학의 대가 갈석 강석호 선생님이 고고의 소리 지르며 두 주먹 불끈 쥐고 태어나 자라고， 어릴적 뛰놀며 문학의 꿈을 키우던 그 흙을 내가 오롯이 밟는 것이었고， 그 분과 함께 한시대에 살면서 가까이 모시고 배우며 문학기념비 제막식이란 이 뜻깊은 행사에 동참하게 된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대단한 행운아 이기에 조용히 마음깊이 감사했다. 그러기에 우리 생애에 주어진 다시 올 수 없는 남은 시간을 여기에서 아낌없이 쓰고 가는 것은 삶의 보람이요 생의 향기라 생각했다.
　
한국 문단의 황무지 수필문학의 허허벌판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많은 것에 가난했고， 많은 것에 목말랐던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선생의 젊은 날을 불태워 오늘의 한국 수필문학이란 한 장르로 일구어낸 그 노고와 공은 문학기념비 건립은 물론이요 먼 훗날 후세까지 한국 수필문학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그의 선영이 고이 잠들어 있는 선산 앞 나지막한 언덕위에 남해 바다 건너 금산(錦山) 정상을 응시하며 우뚝 세워진 갈석 선생님의 문학기념비가 한눈에 들어오고 조용했던 하동 금성면 진정리 조그마한 어촌마을에 군수님을 비롯 축하객으로 일거에 흥청거렸다.
　
잘 다듬어진 문학기념비에는 그의 가족사와 갈석선생님의 대표작 "흔들리는 나뭇잎"이 새겨져 있고 기념비 건립에 함께 뜻을 모은 문학동인들의 이름이 빼곡이 적혀있어 그가 여기까지 외롭게 문인으로 걸어온 삶의 흔적과 세월의 이끼가 한눈에 보이는 듯 했다.
　
나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오랜 세월이 흘러 먼 훗날 오늘 여기에 함께한 축하객이 아무도 이 땅에 없을 때 이 문학돌비는 풍우대작(風雨大作) 비에 씻기고 세월의 바람에 깎이면서도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바다의 등대처럼， 정원의 외등처럼 거기 서서 오늘의 역사를 오고 오는 후세에 웅변으로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갈석 선생님에게 어떤 피나는 인고의 세월이 있었기에 오늘 그토록 영혼을 울리고 가슴을 적셔주는 깊고 광대하면서도 극도로 절제된 한국 수필문학의 광맥을 찾아내고 있을까. 정녕 평생 오직 수필 한길 긴 편력(遍歷) 끝에 돌아온 달관(達觀)의 열매라 생각해 본다.
　
돌아오는 귀경길 고속도로변 코스모스 제 멋에 겨워 하늘거리고， 차창 넘어 고즈넉한 언덕엔 그 누구의 무덤인지 조용히 옹기종기 잠들어 있고 심장 고동은 멈추었어도 아직 심장의 피는 조금은 식지 않은 듯 잔디보다 붉은 흙이 더 많아 보인다. 저 무덤 주인은 누구일까? 평생 못다 푼 한(恨) 혹 누군가의 가슴에 깊이깊이 묻어놓고 외롭게 저기 그림자만 혼자 누웠을까? 아! 인생무상， 생각의 꼬리가 물고 물며 1박 2일의 오래오래 잊을 수 없는 나의 짧은 여행은 이렇게 '아디유'를 고(告)하며 두 손을 모았다.　

오성건/송정교회 원로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