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울린 복음의 종소리

그가 울린 복음의 종소리

[ 기고 ] 故 이종성 박사님의 3주기를 맞으며

정행업 목사
2014년 09월 17일(수) 10:26

10월 2일은 고 춘계 이종성 박사님께서 돌아가신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이종성 박사님은 한국 교계와 신학교에 큰 족적을 남기신 분이다. 신학자로, 행정가로 그가 이루어놓은 업적이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할 수가 없다. 이 박사님은 진리 탐구를 위해 전 생애를 투신한 분이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시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오직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길을 찾아 헤매셨고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도일해서 동경신학을 졸업한 뒤 도미하여 풀러, 루이빌, 프린스턴에서 수학하고 마침내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셨다. 이 박사님의 자서전에 의하면 새벽 2시까지 늘 공부했다고 하셨다.
개인적으로 이 박사님은 필자의 석ㆍ박사논문을 지도하셨다. 논문지도를 받기 위해서 그의 사무실이나 자택을 방문했을 때 박사님은 언제나 원고를 쓰고 계셨고, 그 후 오찬을 약속하고 학술원을 찾았을 때도 그의 한 생애를 정리하시는 듯 자서전 원고를 쓰고 계셨다. 그 때마다 많은 감명을 받았다. 진리 탐구를 위해서는 동서를 주유했고 보화를 캐내는 심정으로 자료를 찾아 헤매셨다. 학구적 자세를 잃지 않고 정진하신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이 박사님은 훌륭한 신학자였다. 역사적으로 동서고금 수많은 신학자들의 다양한 신학과 사상을 섭렵하시고 나름대로 신학체계의 기틀을 성서적, 복음적, 개혁 신학적, 에큐메니칼 신학을 준거로 하여 정통신학을 세우셨고 이를 넘어 통전적 신학을 제시하셨다. 그리하여 한국 교계와 신학계의 많은 분열과 분쟁 중에도 신학 노선을 굳건히 견지하여 신앙과 신학의 좌표와 방향을 선도해주셨다. 이 박사님께서 가르치시고 남겨놓으신 신학 전집 40여 권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이 박사님은 엄격하면서도 다정한 스승이었다. 언제나 어디서나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러면서 '학문의 길에는 왕도가 없다'고 하시면서 열심히 공부할 것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학점을 주는 데는 무척 인색하면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고 후학을 지도하셨다. 참으로 훌륭한 스승상을 보여주셨다.
 
이 종성 박사님은 탁월한 행정가였다. 연세대학교의 중요한 보직을 맡아 수고하셨고 특히 장신대 책임자로 십수년 간 봉직하면서 신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셨다. 그리고 국내 연합기관이나 기독교 국제기관에서도 중요한 자리에서 공헌하여 한국과 아시아와 세계 교회에 기여하셨다. 마침내 본교단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교단을 이끄셨다. 학자로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책임을 맡으셨다.
 
끝으로 이 박사님은 만능 운동선수셨다. 탁구, 야구, 축구, 테니스 등 운동이라면 못하는 게 없으셨다. 가르치거나 연구하다가 피곤하면 운동으로 피로를 푼다고 하셨다. 한 번은 논산훈련소에 초청을 받아 훈련생 정신훈화를 하고, 마친 후에 테니스를 하게 되었다. 이 박사님과 필자가 한 조가 되고 훈련소장과 연대장이 한 조가 되어 시합을 했는데 우리 조가 승리를 했다. 이 박사님은 시합에 임하면 강한 승부욕을 보여주셨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신학도들은 교실이나 도서관에서 박사님이 남겨놓으신 진리탐구의 길을 따를 것이다. 목회하는 사역자들은 목양실에 비치해놓은 박사님의 저서를 통해 바른 길로 양들을 인도할 것이다. 또한 뒤를 따르는 신학자들은 발제하신 통전적 신학을 계승 발전하도록 정진할 것이다. 주여! 비옵기는 주의 종은 주님께 갔지만 그가 울린 복음의 종소리(鐘聲)는 이 강산에 널리 울려 퍼지게 하소서. 

정행업 목사/전 대전신학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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