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자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자

[ 기고 ] 제40회 전국장로수련회 주제강연 요약

오덕호 총장
2014년 07월 15일(화) 16:46

 
지금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바른 신앙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바른 신앙이 무엇인가? 바울은 바른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는 믿음이라고 한다. 야고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한다. 왜 바울과 야고보가 다를까? 바울은 히브리적 믿음을 말했다. 히브리적 믿음은 행위까지 포함하는 믿음이다. 바울이 말한 행위는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이다. 사람은 이런 행위로 구원받는 게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행위를 무시한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는 헬라적 믿음을 말했다. 헬라적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는 믿음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런 믿음으로는 안되고 행동까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야고보가 말한 행위는 예수님께 순종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위를 강조한 것이다.
 
신앙생활에는 두 가지 행함이 있다. 종교의식을 지키는 행함과 바르게 사는 행함이다.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있어야 산 믿음이라고 할 때의 행함은 바르게 사는 행함이다. 야고보는 어려운 사람에게 평안이 임하도록 기도만 하는 것은 행함이 없는 것이고, 실제로 도움을 줘야 행함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바르게 사는 행위가 있어야 산 믿음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행위만 잘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혹시 예배에 잘 참석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지 않는가? 헌금을 많이 하면 복을 받는다고 믿지 않는가? 이렇게 믿는 사람이 바르게 살려고 하겠는가? 바르게 살지 않아도 예배와 헌금만 잘하면 구원과 축복을 받는데? 물론 예배나 기도 같은 종교행위도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종교행위만 하면 산 믿음이 되는 게 아니다. 바르게 살아야 산 믿음이다.
 
성경은 행함이 있어야 산 믿음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행함이 얼마나 있어야 산 믿음인가? 그런 기준은 없다. 만일 어느 정도 이상의 행함이 있어야 산 믿음이라고 하면 행함이 구원의 기준이 된다. 이것은 율법주의이고 불신앙이다. 우리는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래서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은 행함이 어느 정도 이상 있는 믿음이 아니라 반드시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 믿음이다. 산 믿음은 이렇게 믿기 때문에 저절로 행함이 나타난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 진심으로 통회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점점 죄에서 멀어지며 성화되어가는 것이다.
 
이제 바른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자. 바른 삶은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삶이고 공의의 삶이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사는 공의의 삶은 사랑의 삶과 같다. 그런데 성경이 가르쳐주는 공의는 상대방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다. 기독교의 황금률이라고 하는 마태복음 7:12를 보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게 바로 공의의 삶이다.
 
그렇다면 이웃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은 생존권과 인권과 재산권이다. 이것은 십계명 6, 7, 8계명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이웃에는 공동체 이웃도 있고 개인 이웃도 있다. 먼저 공동체 이웃인 사회가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뭘까? 사회의 생존권을 지켜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를 지켜주는 게 바른 삶이다. 그런데 사회를 지키기 위해 만든 게 법이다.  법을 어기면 사회가 무너지고 법을 지켜야 사회가 지켜진다. 그래서 사회는 우리에게 법을 지켜주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사회법을 지키는 게 공의의 삶인 것이다. 우리는 법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법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정이고, 사랑은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켜야 할 최대한의 목표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의로운 삶이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려면 법부터 지켜야 한다. 법을 어기면 이웃을 해치게 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러니까 법을 어기면서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우리가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려면 반드시 사회법부터 지켜야 하는 것이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바른 교회가 될 수 있다. 어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인가? 설교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회의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한다. 당회와 제직회에서 사회법을 지키며 교회 사업을 하자고 말해야 한다. 그래야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의 교회가 될 수 있다.
 
개인과의 관계에서 공의로운 삶을 살려면 개인이 기대하는 것을 해줘야 한다. 사람이 가장 먼저 원하는 것은 생존권이다. 그래서 의로운 행동은 이웃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웃의 생명에 해를 끼치는 것은 불의한 행동이다. 세월호 관련자들의 행동은 이웃의 생명을 해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불의한 행동이었다.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과속하고, 신호를 위반하는 것도 이웃의 생명을 해치는 불의한 행동이다. 기업주가 근로자를 위해 안전시설을 하지 않는 것도 생명을 위협하는 불의한 행동이다.
 
이웃은 인권이 존중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인권을 존중해야 의로운 사람이다. 말로 이웃을 욕하고 인권을 무시하는 것은 살인과 같다고 할 정도로 불의한 일이다.(마 5:22) 이웃은 재산권이 존중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웃의 재산을 해치는 것은 불의한 행동이다. 강도짓은 말할 것도 없고 근로자를 착취하는 것도 불의한 행동이다. 근로자가 직장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기업주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는 불의한 행동이다. 저작권도 마찬가지이다.

이웃의 생존권, 인권, 재산권을 해치는 모습은 얼마든지 있다. 여기서 행동지침 하나하나를 다 살펴볼 수는 없다. 진짜 중요한 것은 이웃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이웃을 진심으로 존중하며 보호해줘야 한다. 절대 해치지 말아야 한다. 이게 의로운 행동이고 우리는 이런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바른 삶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기 바란다.

오덕호 총장
한일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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