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와 교회 (2)치유의 사명

세월호와 교회 (2)치유의 사명

[ 특집 ]

김의식 목사
2014년 06월 10일(화) 11:35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김의식 목사
치유하는 교회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은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 보다 죽음의 슬픔의 시간을 갖고 있다. 지난 4월 16일 진도 앞바다 세월호 참사(사망 292명, 실종 12명)로부터 시작해서 5월 25일 고양종합터미널 화재사고(사망 8명, 부상 58명)을 비롯해서 지하철 추돌사고, 흔들리는 주차타워 화재사고, 도곡역 방화사고, 명일아파트 화재사고에 이어 장성 효사랑병원 방화참사(사망21명, 부상8명)에 이르기까지 각종 재난의 슬픔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때 우리에게 치유는 너무도 절박한 것이다. 치유는 영, 혼, 육의 전인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그 근거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치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 영의 치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6)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영의 죄악을 담당해 주셨다. 바로 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고 주님의 대속을 믿기 전에는 진정한 치유를 받을 길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엄청난 재난의 슬픔가운데서 욥의 세 친구들처럼 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재난을 일으킨 사람을 탓하고 정죄하기보다도 우리의 책임과 죄악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책임을 함께 나누며 참회하는 심정으로 다가갈 때 우리는 그들의 마음 문을 보다 더 쉽게 열게 하며 감동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영의 치유는 지난날의 우리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악을 회개하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할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안의 모든 재난의 슬픔을 치유토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그리할 때 우리의 어떠한 치유의 노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효과적인 성령의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호6:1-3).

2. 혼의 치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사 53:4하, 5중)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영의 죄악만 담당하신줄 알지만 혼의 상처도 담당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의 어떠한 상처도 치유해야 한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ubler Ross)는 죽음의 심리의 5단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첫 단계는 부정(Denial)이다. 임종이 가까운 자는 가장 먼저 '아니야, 난 믿을 수 없어. 나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어'하는 부정의 심리가 나타난다. 그래서 죽음을 다른 사람의 일인 것처럼 믿으려고 하지도 않고 죽음으로부터의 치료나 구조조차도 거부코자 한다.

재난 당한 사람들도 '왜 우리 아들이나 딸이 그렇게 죽을 수 없어. 난 믿을 수 없어…'하고 부정의 반응을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심리치료를 강요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마음의 감정이 담긴 말을 경청해 주는 것이 최우선적인 치유의 과제이다. 그들은 실종자의 조속한 구조와 수습, 명확한 사고 원인의 규명, 엄중한 책임자 처벌 등도 바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그들의 마음에 닥친 충격과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을 들어주고 그들의 말이나 행동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것은 치유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치유적 경청(Therapeutic Listening)'이라고 하는데 이 경청만 잘 해주어도 치유의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분노(Anger)다. 임종에 가까운 자는 그 다음에 '하필이면 왜 내게 이런 죽음이 닥칠 수 있어?'하고 분노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 때 그들은 그 자신이나 가족이나 주위사람들, 심지어는 하나님에게까지 분노의 감정을 폭발시키게 된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도 '왜 하필이면 이런 일이 내 자녀에게 일어날 수 있어? 내가 그래도 믿음으로 살아왔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내게 그러실 수 있어?'하면서 분노의 감정을 폭발시킬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 재난 당한 유가족이 이성을 잃거나 신앙이 흔들려 분노하는 모습에 실망하거나 반발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도 그토록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심정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음을 이해하면서 그들의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하고 발산토록 하는 것은 그들을 치유해 나가는데 대단히 소중한 과정이다.

셋째는 타협(Bargaining)이다. 임종에 가까운 자는 그 다음에 불가능한 죽음을 어떻게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타협하려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언제까지 살려줄 수 있다면… 그때까지라도 고통 없이 지낼 수 있다면…"이라고 표현하면서 타협을 시도하는 것이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도 '우리 아들(딸)이 살아 돌아올 수만 있다면… 시신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하고 타협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때 재난 당한 자들을 위한 우리의 중보적 기도가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전체적으로나 소그룹 모임을 통해서라도 계속해서 그들을 위한 중보적 기도는 그들의 치유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중보적 기도 가운데 기적의 응답을 허락하실 수도 있고 또 그 재난 속에서의 또 다른 치유의 길을 극적으로 열어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우울(Depression)이다. 그토록 합심해서 기도하며 모든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종에 가까운 자는 더 이상의 회복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 우울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죽음의 절망은 말할 것도 없고 외롭게 남게 될 가족들과 그들이 살아갈 앞날에 대해 걱정하며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은 더 이상 자녀들이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시신 조차도 수습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우울증에 빠지고 만다. 그때 우리는 그들의 우울증의 회복을 위한 사랑의 섬김이 절실히 필요하다. 방안에 칩거하기만 하기보다는 맑은 공기, 따스한 햇살, 아름다운 경치를 접하며 자연을 통한 생태치료(Ecotherapy)가 효과적이다(롬1:20).

더 나아가 교회의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교제와 상담 치유 등 사랑의 섬김의 모임에 참가하는 것도 그들을 우울증에서 헤어나오게 하고 슬픔을 치유해 나가는데 더욱 더 큰 치유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다섯째 수용(Acceptance)이다. 임종자들은 마지막으로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수용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때 우리는 그들에게 임종 준비에 대해 알려주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도 받아들여야 하는 가족의 상실감을 포옹해 주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가 죽음의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죽음의 현실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치유의 마지막 관문이다. 그것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의 말씀처럼 마지막 순간에 사랑을 고백하며 용서하고 화해하며 떠나보내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God loves you), 우리도 당신을 사랑합니다(We love you, too)"라며 사랑의 화해의 감격 속에 떠나보내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기 때문이다(시 39:7). 바로 이 천국의 소망보다 우리에게 닥친 슬픔의 고통을 이겨내게 하는 명약은 없다.

그런데 위의 치유의 과정을 통해 당장 우리가 이 모든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 슬픔의 상처가 아물어 가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강요하면서 치유를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그들이 치유되고 회복될 때까지 교회가 할 수 있는 모든 신앙의 자원을 총동원하여 지탱해야(sustain) 한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그때 그 아픔이 왜 우리에게 필요했는가를 회고하며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릴 날이 머지않아 꼭 다가온다는 것이다(계 21:3-4).

3. 육의 치유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상, 5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영의 죄악과 혼의 상처뿐만 아니라 육의 질병까지도 담당하셨다. 이처럼 우리의 영의 죄악의 치유와 더불어 혼의 상처의 치유가 이루어 질 때 육신의 질병의 치유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는 말씀에서 우리는 "네 영혼이 잘됨 같이"가 흔히 "믿음이 잘됨 같이"로 생각하기 쉬운데 영어성경(NIV)에 보면 "as your soul is getting along well"로서 우리의 혼 즉 마음이 치유되고 회복됨에 따라 우리의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게 될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이처럼 지난날의 상처가 치유되어 행복을 회복하게 될 때 우리는 욥과 같이 하나님의 축복을 회복하는 해피엔딩으로 모든 재난은 끝이 나는 것이다(약 5:11). 이처럼 영, 혼, 육의 전인치유는 서로 유기적인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순차적인 치유인 것이다(살전 5:23).

현대 사회의 화두는 치유(Healing)이다. 말세의 마지막 때 우리의 현실은 치유가 너무도 절실하기 때문에 이 치유를 갈급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교회가 고통당하는 이들의 치유에는 관심이 없고 율법이나 교리나 전통에 얽매여 불화와 분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그러한 교회는 이 땅에서 도태되고 멸절되고 말 것이다. 이제 우리 한국 교회가 고통당하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치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마지막 때 슬픔과 고통 가운데 울부짖는 이들을 위한 교회의 절박한 사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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