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회·신학 ] 현대신학산책
박만 교수
2014년 05월 19일(월) 16:15
▲ 본회퍼 |
본회퍼는 열일곱 살 되던 때 튀빙겐대학에 입학했고, 다음해에 베를린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스물한 살 되던 1927년, 박사학위 논문으로 '성도의 교제'를 제출했고 3년 뒤인 1930년에 교수 자격 논문으로 '행동과 존재'를 썼으며 이 책과 함께 학자와 목회자로서의 삶의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학위과정을 마친 그는 잠시 미국을 다녀온 뒤 약 1년 동안 베를린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그 후 영국 런던의 독일인 피난민들로 구성된 교회에서 약 2년간 목회를 했다.
바르트, 틸리히와 마찬가지로 본회퍼의 생애 역시 히틀러와 독일 제3제국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이전의 글에서 보았듯이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한 독일의 무너진 경제와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시켰고,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독일교회는 '독일 그리스도인의 신앙 운동'을 조직했는데 독일 대부분의 교회가 여기에 참여했다.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은 히틀러를 무너진 독일을 세우고 온 세계에 번영을 가져다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라고 선전했으며, 나치스 운동을 행동하는 적극적인 기독교라고 하였다. 하지만 본회퍼는 히틀러의 운동에 들어있는 우상 숭배적이며, 반기독교적인 정신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히틀러가 총통이 된 다음 날 아침 베를린 방송을 통해 '젊은 세대에 있어서 지도자 개념의 변화'라는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그는 "하나님은 직책을 세우셨고, 이 직책에 맞는 사람을 세워서 일하게 하신다. 그런데 직책에 관계없이 어떤 사람에게 전권을 주게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요 결국 우상 숭배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방송은 도중에 중단되었고, 이때부터 본회퍼는 게슈타포(Gestapo)의 감시를 받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교회와 유대인 문제'라는 논문에서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당시 유대인들을 쫓아내던 독일교회를 비판했다. 그는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따라서 어떤 특정 인종이나 사람이 교회에 올 수 없을 때, 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거부하는 것이요 기독교의 존립 정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을 쫓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은 감히 그레고리안 찬송가를 부를 수 없다"라고 외쳤다. 이런 활동을 통하여 본회퍼는 자연스럽게 히틀러를 반대하고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독일 고백교회 운동의 지도자로 부각되었으며 곧 고백교회가 운영하는 핑켈발데신학교의 책임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