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본회퍼 ① 독일 고백교회 운동의 지도자

[ 목회·신학 ] 현대신학산책

박만 교수
2014년 05월 19일(월) 16:15

   
▲ 본회퍼
바르트와 틸리히보다 한 세대 뒤에 활동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1906년 2월 4일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아버지 칼 본회퍼와 어머니 파울라 사이의 8남매 중 여섯째이자 쌍둥이의 첫째로 태어났다(일곱째는 쌍둥이 누이동생인 사비네 본회퍼). 아버지 칼은 정신의학과 교수로서 많은 신학자, 예술가, 법률가를 배출한 명문 출신이었다. 그의 어머니 파울라의 아버지는 궁정목사였고 조부는 19세기 최대의 교회사가인 아우구스트 폰 하제였다. 이처럼 신앙과 학문의 전통 속에 태어난 본회퍼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보였고 문학과 음악에도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본회퍼의 집안이 학자, 예술가, 종교인들을 많이 배출하긴 했지만 그의 가족들은 그다지 열심있는 신앙인들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경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버지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불가지론자이자 과학자로서 철두철미 실증주의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가족 중 누구도 정기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분위기였기에 본회퍼가 열네 살 때 목사가 되겠다고 밝혔을 때 가족들은 모두 반대했다. 하지만 본회퍼는 "그렇다면 내가 그것을 개혁하겠다"면서 굳은 의지를 보였고, 그런 단호한 모습에 가족들은 곧 그 결정을 존중하였다. 그 후 그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본회퍼는 열일곱 살 되던 때 튀빙겐대학에 입학했고, 다음해에 베를린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스물한 살 되던 1927년, 박사학위 논문으로 '성도의 교제'를 제출했고 3년 뒤인 1930년에 교수 자격 논문으로 '행동과 존재'를 썼으며 이 책과 함께 학자와 목회자로서의 삶의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학위과정을 마친 그는 잠시 미국을 다녀온 뒤 약 1년 동안 베를린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그 후 영국 런던의 독일인 피난민들로 구성된 교회에서 약 2년간 목회를 했다.

바르트, 틸리히와 마찬가지로 본회퍼의 생애 역시 히틀러와 독일 제3제국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이전의 글에서 보았듯이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한 독일의 무너진 경제와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시켰고,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독일교회는 '독일 그리스도인의 신앙 운동'을 조직했는데 독일 대부분의 교회가 여기에 참여했다.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은 히틀러를 무너진 독일을 세우고 온 세계에 번영을 가져다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라고 선전했으며, 나치스 운동을 행동하는 적극적인 기독교라고 하였다. 하지만 본회퍼는 히틀러의 운동에 들어있는 우상 숭배적이며, 반기독교적인 정신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히틀러가 총통이 된 다음 날 아침 베를린 방송을 통해 '젊은 세대에 있어서 지도자 개념의 변화'라는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그는 "하나님은 직책을 세우셨고, 이 직책에 맞는 사람을 세워서 일하게 하신다. 그런데 직책에 관계없이 어떤 사람에게 전권을 주게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요 결국 우상 숭배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방송은 도중에 중단되었고, 이때부터 본회퍼는 게슈타포(Gestapo)의 감시를 받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교회와 유대인 문제'라는 논문에서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당시 유대인들을 쫓아내던 독일교회를 비판했다. 그는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따라서 어떤 특정 인종이나 사람이 교회에 올 수 없을 때, 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거부하는 것이요 기독교의 존립 정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을 쫓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은 감히 그레고리안 찬송가를 부를 수 없다"라고 외쳤다. 이런 활동을 통하여 본회퍼는 자연스럽게 히틀러를 반대하고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독일 고백교회 운동의 지도자로 부각되었으며 곧 고백교회가 운영하는 핑켈발데신학교의 책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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